해파리 비교상영회: 입을 떼다, 귀를 열다

-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



2024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기념하여 웹진 ‘결'에서 온라인 영화제를 개최합니다. ‘입을 떼다', ‘귀를 열다’라는 주제로 구성된 영화제는 2000년대를 전후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다층적으로 살펴보도록 합니다. 7편의 영화, <오키나와의 할머니>(야마타니 데쓰오, 1979),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박수남, 1991), <50년의 침묵>(네드 랜더, 1994), <일용할 양식>(루비 챌린저, 2018),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반중이, 2007), <그리고 싶은 것>(권효, 2012), <22>(궈커, 2015)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A: 안녕하세요, 난둘씨. 글이 아니라 서로 얼굴을 보고 영화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네요. 사실 이번 2024 기림의 날 웹진 ‘결' 온라인 영화제의 작품을 먼저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된 영화들도 있었고, 이 영화들에 대한 저희의 생각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될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저희가 보지 못한 영화가 무수히 많고,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어떠한 자격 또는 지식이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필요했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난둘은 이번 대화를 준비하며 어떠한 마음이었나요?


난둘: 영화를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위안부’를 주제로 하는 영화나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역사를 주제로 하는 영화, 이와 관련된 논의를 심층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만큼 저 역시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웹진 ‘결'의 글을 중심으로 사고를 확장하며 영화를 봤습니다. ‘위안부’에 대한 논의는 레이어가 매우 중층적이다 보니, 각 영화를 통해 본 것들을 이야기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A: 맞아요, ‘위안부’ 관련 논의는 여성주의 연구, 역사 연구,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인데, 영화제를 통해 처음 들어가게 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웹진 ‘결(KYEOL)’에서 다양한 글을 읽고 공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저희가 평소에 좋아하는 분들의 글이 많더라고요.
 영화제의 구성으로 시작해 보고자 하는데요. 프로그램은 ‘입을 떼다'와 ‘귀를 열다'라는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000년을 기점으로 영화들은 각각 4편과 3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2000년대 이전에는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과 발화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후의 영화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 증언과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한 편으로는 시간에 따른 죽음 앞에서 기록의 책무를 지고 있는 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난둘: ‘위안부’를 증언하는 목소리는 1991년 김학순 님의 증언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90년대부터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하는 영화들도 시작됐죠. ‘입을 떼다'의 경우는 그전까지는 다뤄지지 않았던 논의에 대한 장을 만드는 장으로, 조선인 ‘위안부’ 뿐만 아니라 조선인 군속, 강제 징용 노동자들, 네덜란드 ‘위안부’의 증언을 듣습니다. 그럼으로써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식민지배 역사와 관련된 피식민과 식민의 문제, 그러면서도 아시아의 여성과 백인의 여성이 계층화되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하는데요. ‘귀를 열다' 에서는 증언을 넘어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교착 상태에 놓여 있는 영화들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A: 그런 점에서 ‘입을 떼다'의 시작이 <오키나와의 할머니>라는 점이 징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1991년 김학순 님의 증언을 남한에서 최초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오키나와의 할머니>의 주인공인 배봉기 님은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게 되죠. 무국적자로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님이 강제 추방을 막기 위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에서 이는 밝혀야만 하는 사실이었고, 이러한 증언은 일본 언론의 보도를 통해 확산됐고요. 그런 점에서 1990년 일본 정부가 국가는 ‘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발언으로부터 김학순 님의 증언이 자발적이었다는 것과 달리 배봉기 님의 증언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적인 증언자로서 위치하기에는, 그리고 오키나와의 자이니치, 게다가 무국적자였다는 점에서 남한, 북한, 일본의 다양한 지형에서 이분을 남한의 ‘위안부’ 운동 내에서 끌어안기에는 복잡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 ‘위안부' 운동이라고 한 이유는 남한의 운동가와 활동가들, 그리고 정치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위안부' 문제를 위치시키고자 했는가를 생각했는가에 따름입니다.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 외에도 일본군 ‘위안부’는 연합군의 군사 기록와 같은 도쿄전범재판에서 제출되었던 증거 자료들은 계속해서 존재해 왔고, 전쟁에 참전했거나 강제로 징용됐던 남성 생존자들의 구전이나 문학을 통해 ‘위안부’라는 존재는 90년대 전부터도 말해지던 사실이었습니다. 김학순 님의 증언이 공적 자리에서 증언의 형태로 발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지만, 역사라는 것은 계속해서 서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최근 들어간 정의기억연대의 홈페이지의 소개 역시 김학순 님의 증언을 최초의 시점으로 명징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은 보다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난둘: 김동령 감독님이 웹진에 게재하신 글 「누가 이미지를 두려워하는가」에서 이러한 대목이 나오는데요. 병원의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유독 혼자 있는 할머니가 있어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는데, 다른 할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저 여자는 가짜예요.”라고 말했다고요. ‘진짜'와 ‘가짜'로 진짜 증언, 적절한 증언, 사실을 밝히기 위한 증언을 명징하게 가려내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A: 그러한 점에서 저는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충격적이었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배봉기 님의 증언이 과연 한국 사회에서 소구 될 수 있는 적절한 증언인가의 문제는 다시 이야기하고 싶고, 그러한 증언을 끌어내는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의 발언이 모두 충격이었어요.


난둘: 맞아요, 저도 감독이 질문하는 방식에서 의도적으로 질문하는 것이 보여서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A: 감독이 배봉기 님한테 그러한 말을 하잖아요. 하루에 몇 명이 위안소로 찾아왔냐는 질문에 이어서 “특히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은 없었나요?”라고 물어보는데, 배봉기 님은 “일본군은 상냥해요"라고 에둘러 대답하지만, “하지만 그중에 또..”라며 집요하게 묻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그중에 또는 뭐죠? 유사 애인 관계라던가 뭐 그런 걸 기대하고 말하는 걸까요? 그런데 배봉기 님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어려운 사람도 있지요"라고 말해요. 당연하죠.
 마지막 부분에서는 배봉기 님과 감독이 밥을 먹는 장면이 길게 등장하거든요. 항상 혼자 먹냐는 질문에 배봉기 님은 “혼자니까 혼자서 먹죠.”라고 대답해요. 감독이 “역시 둘이서 먹으니 좋죠?”라고 말하니 “오늘은 야마타니 씨와 둘이 먹어서 맛있었어요. … 부부처럼”이라고 대답을 하는데요. 저는 감독이 이런 식의 대화 - 여성의 발언을 증언으로 채택하는 것으로 적합한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방식, 현재에도 법정에서 많은 성폭력 피해자의 발언이 공격받는 발화 - 를 끈질기게 유도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화제와 함께 몇 개의 글이 웹진 ‘결'에 공개되면서,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이 촬영 당시 작성한 기록 「감독의 목소리로 만나는 <오키나와의 할머니>」도 함께 올라왔어요. 거기에 이러한 말이 나오거든요.

“셋째, 영화는 공개 직후, 전국적으로 반향이 있었고, 배 할머니에게 많은 성금이 모였다. 나는 즉시 그 성금을 가지고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가 처음 산 것은 금반지(조선에서는 결혼의 상징)였다. 그리고 나를 집에서 준비한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식사 후 "맛있었네, 부부 같아."라고 갑자기 고백하는가 하면,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던 소녀 시절을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뭐, 이러한 말이 나오는데 저는 솔직히 이 감독의 기록을 신뢰하기 어려웠어요. 이상한 말이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카메라로 자신을 보고 난 후 자기 반성일 수도 있고요. 사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자신의 발화에는 거의 고민의 여지가 없고, 카메라 앞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순진한 남성으로서의 자기를 해명하는 데에 급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러한 인터뷰와 기록, 그리고 이러한 인터뷰로 남겨진 증언들을 사료로써, 만약에 증언의 일부로서 본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또는 해석되어질까에 대한 많은 고민이 들었어요.


난둘: 저는 전 일본 육군 기술 요원인 최창규 님을 인터뷰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아요. 감독이 그에게 전쟁 중에 어떻게 성욕을 해결했는지를 질문하잖아요. 영화의 첫 장면은 조선인 여성이 웃고 있는 사진에 감독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위안부라는 이름의 매춘부가 군에 강제 징용되어 노리개가 되어 있으며 그중 태반이 조선인 여성이다”라고 내레이션하는데요. 그 장면을 보며 감독이 영화를 시작하고 편집을 할 때까지 ‘위안부’ 여성이 매춘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감독이 최창규 님에게 어떻게 성욕을 해결했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조선인 식민지 여성을 강제로 납치하여 끌고 가서 만들어진 위안소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사실 인터뷰라는 것은 인터뷰어가 원하는 방향대로 답을 해주게 되잖아요. 최창규 님은 감독의 질문에 전쟁 당시에 조선삐, 만주삐, 로컬삐를 이용할 수 있었고, 나는 인도적으로 조선삐는 가지 않고 일본삐에 갔다는 대답을 하는 것이 이제 감독의 의도대로 답이 나왔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해요. 이 ‘삐’라는 단어는 멸칭인데, 일본군이 ‘위안부’를 ‘삐'라고 부르는 방식을 조선인 군속이었던 ‘최창규'가 발화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위안부’는 말 그대로 위안을 주는 성욕 해소의 대상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A: 맞아요, 난둘의 말처럼 이 영화가 ‘오키나와의 할머니'인 배봉기 님의 증언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초반 20분은 한국에서 주로 남한의 남성들을 인터뷰하며, 배봉기 님을 알게 된 후 오키나와로 향하게 된 감독이 등장해요. 그리고 배봉기를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만나게 되는데, 감독은 여러 차례 배봉기를 인터뷰하면서 남성 군인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것들을 교차로 붙여놓아요.
 이렇게 교차로 인터뷰를 배치하는 방식이 흥미로워요. 배봉기 님을 중심으로 남성들의 인터뷰를 주변부에 놓는데 그것이 어떠한 의도대로 보여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에요. 오키나와 주민들의 증언을 넣기도 하는데, 그때도 기지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죠. 오키나와 주민들도 위안소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은 원래 매춘하던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택시 기사와 다른 주민들도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일본군 ‘위안부’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했다고 말하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오기 전에는 매춘부, 풀려나간 뒤에는 기지촌 여성이 되었다는 증언들을 교묘하게 뒤섞어 가는 방식, 그러나 배봉기의 증언이 그러한 증언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방식이 흥미롭죠.
 영화에서 배봉기 님의 증언에 대해 상반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이 대화를 준비하면서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김은실 엮음)을 열심히 읽었거든요. 그 책의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죽음을 둘러싼 경합: 포스트 식민 냉전 체제 속의 ‘위안부’ 문제'」(김신현경) 글에 이런 서술이 나와요. <오키나와의 할머니> 인터뷰에서 감독이 배봉기 님에게 함께 생활하기도 했던 가즈코라는 ‘위안부’에 대해 질문했을 때, 배봉기 님은 그가 죽었다고 답하는데요. 그러나 이후에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은 해 출판한 책을 보면, 배봉기 님의 지인은 영화에서 가즈코가 죽었다는 배봉기 님의 증언은 가즈코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과거가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고요. 그래서 이러한 정반대의 증언을 미루어 보아, 전후 체제에서 ‘위안부’의 삶은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전쟁 경험을 전후에도 제대로 발화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김신현경 연구자는 얘기해요(246~247).


난둘: 배봉기 님의 증언에 있어서 감독이 배봉기 님의 상황이나 맥락을 이해하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배봉기 님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면, 배봉기 님이 막 소리를 지른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지 않아서, 수수밭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배봉기 님을 미친 할머니라고 불렀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는 배봉기 님의 그런 상황이나 맥락을 이해해 그와 더욱 깊은 라포를 형성하려 하지는 않고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몸이 아파서 만날 수 없었다는 텍스트로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어요. 그래서 다른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로부터 매끄러운 증언을 들으며 배봉기 님의 증언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건 아닌가, 다시 김동령 감독님의 글을 생각해 보면, ‘위안부’ 생존자분에게 이 상처는 어디에서 난 거예요라고 물어보면, 상처와 관련이 없는 아예 다른 얘기를 한다는 식으로 발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어떤 잔여가 남고, 낯설고, 그러니까 매끄럽게 구술되지 않는 상태가 계속 남게 된다고 말하는데요. 그런 잔여가 남는 증언이나 발화를 영화가 효력없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아닌가라는 어떤 영화적 태도를 문제화하게 되는 것 같아요.


A: 맞아요, 그런데 저는 또 감독이 라포 형성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해서 복잡하네요. 아주 오랜 시간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기억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고, 기억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에, 기억에 기반한 증언을 담는 것은 기억에 무엇이 남아있느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어떠한 것을 듣느냐, 그리고 어떻게 듣느냐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박수남 감독님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한 <침묵>(2016)이라는 영화는 그분들의 말을 담을 수 없어 그들의 침묵을 담았다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난둘이 말한 대로 감독이 오키나와에서 찾아다니거나 만난 사람들은 일본군에서 장교로 일하거나 배봉기 님의 주된 인터뷰 장소와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던 남성과 주로 인터뷰했다는 점에서 박수남 감독님과는 ‘위안부’에 관해 말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이 영화는 그러한 말하기의 차이를 보게 만드는 영화인 거죠.
 그리고 그러한 지점에서 지금 이 시점에 <오키나와의 할머니>를 다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영화적 방법론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자리에서 발화되는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을 살펴보게끔 하고, 증언으로부터 억압되어지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합의를 이루고 있었던 지점들, 들리지 않았던 것들을 들리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이 발화되는 자리와 그것들의 변화, 어떠한 자리에서의 언술과 증언이라는 맥락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 복잡성 자체를 보고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뭉뚱그리지 않고요.
 그렇게 말과 사료로서의 증언을 이야기하다 보니, ‘귀를 열다'에서 <가이산시의 자매들>에서 트라우마가 각인된 몸이 등장한다는 점이 인상 깊어요. 이 영화는 ‘가이산시(절세미녀)’라고 불리던 허우둥어라는 인물을 인터뷰하고 싶었고, 그러나 찾아간 후에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증언을 들을 수 없어 그를 기억하는 주민과 또 다른 ‘위안부’ 생존자를 인터뷰하면서 생기는 증언의 어려움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비교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오키나와의 할머니>에서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고향에 대한 점인데요. 고향에 가고 싶지 않냐는 물음에 “고향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말한 <침묵>에서도 등장합니다. <침묵>에서는 배봉기 님의 유골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기도 하는데, 배봉기 님의 죽음 이후 민단과 조총련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조총련은 배봉기 님의 유골을 오키나와에 안치하여 관리하겠다고 한 반면에 민단은 배봉기 님의 언니의 아들을 찾아서 배봉기 님의 유골을 고향에 안치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 갈등은 법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졌고요. 배봉기 님에게 고향에 관해서 이야기하며 ‘위안부’ 논의를 민족주의적으로 포섭하려고 할 때 배봉기 님이 빠져나가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했고, 일본군 ‘위안부’ 뿐만 아니라 전후와 냉전 체제의 특수성, 그럼으로써 다시 돌아와 배봉기 님이 1991년 김학순 님의 증언과는 다르게 위치 지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럼, 박수남 감독님의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흥미로운 건 박수남 감독님의 <침묵>이 아니라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이 기획에 있다는 점입니다. 난둘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


난둘: <오키나와의 할머니>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일본의 식민 지배, 오키나와의 역사, 독립된 류큐 왕국이었으나 일본의 패권주의 때문에 일본에 편입되고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던 어떤 역사적인 맥락이 삭제되었다고 봤어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에서 ‘위안부 여성=할머니’라는 도상적인 방식으로 ‘위안부’ 여성을 주변부에 위치한 여성, 소수자로 구조화하는데, <아리랑의 노래 - 오키나와의 증언>에서는 박수남 감독의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위치가 특수한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김소영 연구자의 논의 「Inside/Outside (內外): Postcolonial Women’s Sphere of Media and Maechae (媒體)」를 빌리면, 일본이라는 내부와 조선이라는 외부가 있는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음으로써 이분법적인 구조에서 벗어난 감독 본인의 삶의 경험을 토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오키나와에 징용되었던 조선인 군속과 ‘위안부’를 위치 짓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앞의 영화와 다르다고 생각했고요.



A: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에서 제가 본 것은 남성 목격자의 증언에서의 여성 ‘위안부’였어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남성들의 전쟁 시기 자기 발화와 같은 방식으로 ‘위안부’와 같은 존재들이 함께 군대에 있었다고 전해졌다면, 이러한 방식이 이같은 남성 중심으로 구축된 역사으로부터 넘어갈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해 주는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영화에서 그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일본군, 조선인 군인, 그리고 미군 모두가 조선인 ‘위안소'를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식민지인으로서 강제로 징용돼야 했던 상황에서 피해자이지만 가해자로서 자신의 범죄 사실 또한 증언하고, 자백하는 기록들 틈에서 ‘위안부’ 여성의 위치가 드러나는 거죠. 그렇게 피해자 안에서도 ‘위안부’ 여성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고요.


난둘: 그리고 그들의 증언에서 “나도 일본 군인들처럼 장난치고 나왔다", “욕을 봤다",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런 곳에 가지를 못했다"와 같은 발언들이 ‘위안부’ 여성을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위안Comfort’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말 그대로 ‘위안부’가 기능했다는 발언을 하는 지점이 군대라는 억압적 국가 장치가 여성 혐오와 성차별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깊게 연관되고 구조적 폭력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달을 수는 있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식민지 가부장제로 연결되는 전쟁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의식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A: 맞아요, 이 영화에서는 남성 증언자들이 반복적으로 황국신민선서를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그 부분을 생각하니 <오키나와의 할머니>에서 배봉기 님이 당연히 일본이 이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생각났어요. 그러한 점이 감독의 수기를 다시 한번 인용하면,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어있는데요.

“ 둘째, 배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일본이 이기기를 바랐어요. 네, 저는 이길 줄 알았어요"라고 태연하게 단언한다. '전 조선인 위안부'가 자신 있게 단언하면, 녹음하고 있던 내가 주눅이 들 정도였다. 내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동시녹음 마이크에 담겨 있다. 전쟁 전,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내선일체'가 배 할머니에게는 전후에도 살아있다. 배 할머니는 철저한 '황국 할머니'였다. 일본이 36년간 조선반도에서 무엇을 했는지, 배 할머니가 그 생생한 증인이다.”

 즉,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에서 황국신민선서를 반복하는 장면은 식민기의 전쟁 기억이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번역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아요.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강 앞에서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남성이 전쟁을 ‘추억'하면서 강이 참 아름다웠다고 이야기를 하며 산책을 하면서 끝나는데요. 이러한 방식으로 식민 남성/피식민 남성들의 미묘한 연대 의식, 그러니까 위험하지만 전쟁이 추억으로 증언되는 부분을 역사에서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남는 거죠. 그러한 번역되기 어려운 말들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떻게 교정되고 억압되는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또 이러한 문제는 탈식민 연구와도 연결되는데,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이 교정을 통해 고립되고 경직된 증언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난둘: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사카이 나오키는 『일본, 영상, 미국』에서 식민과 피식민이라는 이항대립을 피식민자가 스스로를 피식민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식민지가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식민지를 피식민지와 다른 무언가로 위치시킴으로써 식민지를 식민지에 관한 부정성으로 짜맞추게 되는 거죠. 이러한 지점으로 황국신민선서를 반복하여 읽는 부분이나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줄 알았다와 같은 발언을 살펴본다면, 사실은 그러한 발언이 오히려 식민지를 부정하여 그것에 대항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A: 식민지화에 대한 증거로 남을 수도 있죠. 야마타니 데쓰오 감독이 36년 동안 일본이 해온 일을 배봉기 님을 보면서 알게 됐다고 쓴 것처럼요. 황국신민선서나 일본이 이길 줄 알았다와 같은 증언은 일본이 어떻게 식민지 교육화에 성공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사실 이러한 친화적인 증언에 대한 연구들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해요. 그러한 점에서 일제 시기에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영화의 연구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고요. 정창화 연구자의 글을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난둘: 그리고 이들의 증언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뒤섞여 있어요. 그렇기에 증언은 증언 자체로 관객에게 들리지 않고, 자막이라는 형태로 일차적으로 번역이 되어 닿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지점에서 그들의 증언이 대문자 역사로부터 탈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메리 앤 도앤의 이론을 통해 생각해 봤을 때, 영화는 쇼트와 쇼트를 연결해 연속성을 보장하고 필름이나 디지털의 형식으로 남아있기에 지나가 버린 현재, 즉 과거를 아카이빙할 수 있게 되며 그럼으로써 역사성에 개입하게 되잖아요. 이러한 탈주하는 증언들이 필름으로 아카이빙 되면서 주변화된 역사의 역사성에 개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A: 난둘이 대문자 역사와 주변화된 역사라고 이야기해 주었는데, 저는 ‘위안부’가 주변화된 역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위안부’는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전쟁범죄를 이야기할 때 가장 쉽게 끌어올려지는 논의잖아요. 그렇지만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실 아무도 잘 알고 있지는 못하고, 어떤 인상이나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역사인 거죠. 전쟁 역사에서 누락됐고, 전쟁 재판에서도 증언이나 기록이 명징하게 남아있었음에도 처벌되지 못하고, 여전히 이게 사실이냐 진짜냐, 자발이냐 강제냐 이러한 것들을 부서진 언어로 계속 저항해야 한다는 점이요.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를 계속해서 삭제하고자 하고, 현 정부도 마찬가지지만 정권에 따라 역사를 지우고 오염시키려고 시도하는 것들이 화가 나요. <50년의 침묵>에서 얀 루프 오헤른은 네덜란드와 호주의 여성인권활동가로서의 국제적으로도 명징한 위치가 있고, 네덜란드에서는 실제로 일본의 강제 성매매권을 기소하고 일본 군인에게 국제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는데, 아시아에서는 아니잖아요. ‘귀를 열다'의 영화를 보면, ‘위안부’ 생존자의 죽음 이후 증언할 사람이 없음에서 나오는 일종의 무력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위안부’ 생존자들은 “하고 또 하고”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증언을 무수한 자리에서 해야 했어요.
저는 이런 증언의 반복됨으로 드러나는 증언의 소구되지 않음, 즉 ‘위안부’ 문제가 너무 쉽게 어떤 소녀나 할머니와 같은 이미지로 표상되고, 특히 소녀의 모습으로 성애화되는 순수한 피해자성으로 설명되는 지점들로 귀결되는 것과도 맞닿는다고 봐요.


난둘: 제가 주변화된 역사라고 이야기 한 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지점이 있어요. ‘위안부’는 여성 인권 문제이기 때문에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해요. 문제는 ‘위안부’ 역사가 계속해서 끌어올려져서 전쟁 역사로 불리어지고 법적 판결이나 처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지금껏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 남성성으로 인해 구축된 호모소셜한 구조라는 문제 때문은 아닐까, 그러니까 ‘위안부’ 역사를 전범 문제로 만들고 싶지 않은, 전쟁 역사로 만들고 싶지 않은 남성들의 어떤 자기연민 혹은 자기방어기제 때문에 ‘위안부’ 역사가 계속 주변화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A: 맞아요, 그리고 아예 젠더 폭력에 대한 상상력이 협소하죠. <50년의 침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요, 얀 루프 오헤르는 처음부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면서 ‘제네바 협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요. 처음 일본군이 자신들을 강간하려고 했을 때, 이는 ‘제네바 협정'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고요. 얀은 사범대학에 다니던 학생이었고,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홈무비 푸티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얀은 많은 조선인 ‘위안부’와는 분명히 다른 계층에 있는 사람임이 드러나요. 이 지점에서 <50년의 침묵>이 다른 영화와 발화하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면, 영화 자체도 얀이 일인칭 화자로서 이야기한다는 점이죠. 물론 다른 생존자의 인터뷰를 하기도 하는데, 얀의 내레이션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이 되죠.


난둘: 우리가 얀을 ‘서구 백인 여성’이라고 단정 지으면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항대립이 형성이 돼요. 그렇다면 얀이 당당하게 증언을 하는 태도나 다른 ‘위안부’ 여성을 모아 여성 인권 운동을 하는 모습을 ‘서구 백인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단정 짓게 되는 위험성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얀이 자신의 증언을 TV를 통해 바라보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어떤 매체를 통해서 누군가를 바라보는 행위는 그 매체 속에 있는 누군가를 나와 다른 타자로 여기면서 타자화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얀은 증언을 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타자화하게 되죠. 이러한 쇼트가 서구-비서구, 백인-비백인이라는 이항대립적인 논리를 전복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던 네덜란드 여성들이 수용소에서 위안소로 납치됐을 때의 상황을 증언하는, 주로 도망쳐 숨어 있던 네덜란드 여성들을 숨겨 주었다고 증언하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인터뷰가 영화 중간에 삽입이 되잖아요. 인도네시아 근데 그런 인터뷰는 인도네시아 여성들도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던 사실을 삭제하고 그저 인도네시아 여성을 네덜란드 여성을 도운 누군가로 생각하게 만들어요.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벌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제국주의-속의-여성들 중 특히 제3세계 여성의 형상은 ‘제3세계 여성’의 전위된 형상화 속으로 사라지는데, 영화에서 식민지 여성의 ‘위안부’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사라진 피식민 여성 증언을 통해서 중층적인 ‘위안부’ 여성 역사가 재현되지 않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A: 난둘이 서벌턴 얘기를 해 주셔서 대담을 준비하며 읽었던 앞서도 말한 김신현경 선생님의 글이 기억나는데요. 글에서는 서벌턴의 침묵의 논리에 대한 설명이 등장해요. 김신현경 선생님은 국제정치학자인 세라 버트런트는 안보화 이론을 설명하면서, 이 이론이 서발턴을 침묵시키는 메커니즘을 포스트 식민 페미니즘 이론과 페미니즘 발화 행위 이론의 결합을 통해서 해명된다고 말하는데요. 국가주의적 안보를 얘기할 때 발생하는 서벌턴의 침묵은 첫 번째로 서벌턴의 발화 행위를 억제하려는 강제된 침묵이 있고, 두 번째로 서벌턴을 위해 타인이 대신 발화하는 데서 생겨나는 침묵이 있다고요. 즉,  서벌턴의 침묵이 강제됨에 따라 그것을 대신하는 발화가 나타나며, 이들을 대신하는 발화가 있기 때문에 서벌턴은 스스로 발화 행위를 끝맺기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서벌턴의 침묵의 메커니즘은 식민주의와 냉전의 착종이 이들을 침묵하도록 만드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고 말하고 있어요(237~242).
이런 식민, 피식민, 제국주의, 민족주의, 서벌턴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난둘은 얀의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 <일용할 양식>은 어떻게 보셨나요? 얀의 손녀가 만든 영화이기도 하고, 유일한 극영화이기도 하죠.


난둘: 영화의 시작 부분에 다친 아이의 신체가 클로즈업되는 장면이나, 일본 군인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과잉 재현되는 지점이 기억에 남는데요. 일본 군인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폭력은 과잉 재현 되고, 이때 여성의 신체가 폭력의 대상으로 노출되는 지점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에서 아시아인 재현의 방식이 굉장히 일차원적이라는 생각을 했으며, <50년의 침묵>에서 암바라와 수용소는 분명히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있다고 증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여성이 아예 보이지 않는 점도 ‘제3세계 여성’의 사라짐을 말해준다고 생각했어요.


A: 맞아요, 저는 <일용할 양식>에서 인도네시아 여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시대 인종에 관한 재현과 동물 차별의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역사의 문제를 다루는 극영화나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이야기할 때, 홀로코스트 논의를 많이 끌어오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쇼아>와 <사울의 아들>과 같은 영화의 방법론과 아시아, 특히 ‘위안부’를 재현하는 영화는 비교되기에는 조금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연구틀이 맞는냐는 고민이 들어요. 그러한 점에서 아직 국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에서는 어떻게 ‘위안부’를 재현할 것인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 같고요. 난둘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난둘: ‘위안부’를 재현하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보고 생각해야 할 지점은 굉장히 다층적이잖아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었을 때 생각해야 하는 지점과 식민/피식민 논의, 근대성과 연결되는 오리엔탈리즘, ‘제3세계 여성’과 피식민 여성의 사라짐 등등과 같은 논의를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하고요. <50년의 침묵>을 생각해 보면, 네덜란드 여성과 재현되지 않는 인도네시아 ‘위안부’에 대한 논의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이 복잡한 맥락을 논의하기에 굉장히 복잡하니, 전쟁 피해자에 대한 논의와 재현되는 이미지의 윤리와 생각할 때 오랜 시간 연구되어 온 홀로코스트 이론을 끌어오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A: 맞아요, 영화에 대한 이론적 틀뿐만 아니라 영화적 시도 자체도 협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면에 기지촌 여성에 대한 국내의 영화들은 김동령・박경태 감독님의 영화를 비롯해 퍼포먼스와 연계하여 재현하려는 시도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도 궁금해요. ‘위안부’를 이미지로서 어떻게 재현/재연하느냐는 정말 복잡한 문제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90년대의 ‘위안부’ 관련 영화들이 증언의 시작과 함께 사료로서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면, ‘귀를 열다'에서는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 더욱 시급하게 기록을 남기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위안부’에 관련된 논의들을 이어갈 것인가를 고민했고,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인 것 같아요. ‘위안부' 생존자들이 죽고 난 이후 어떻게 ‘위안부'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요. ‘귀를 떼다’에서는 중국 ‘위안부'를 다룬 영화가 3편 중 2편인데, 특히 <22>는 중국의 ‘위안부' 생존자 22명의 이름을 호명하는 영화예요. 궈쿼 감독이 2년 전인 2013년에 제작한 <32>의 제목은 당시 살아있던 32명의 중국 ‘위안부' 생존자들의 숫자를 의미하고요.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은 산시성의 최고의 미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가이산시’라고 불리던 허우둥어를 인터뷰하고자 하는데, 이미 그는 죽고 난 뒤인지라 주변인들을 인터뷰하고, 그러면서 다른 ‘위안부' 생존자들을 만나게 되죠. 이 두 영화 모두 ‘위안부' 생존자의 몸과 증언할 수 없음을 다루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그러한 점에서 앞에서 우리가 봤던 4편의 영화와는 다른 결이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난둘: 죽음이라고 한다면, 역사적인 관점에서 피해자와 희생자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관련 논의에서 피해자가 죽었을 때 피해자를 질료화해 이태적인 희생으로 승화시켜야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점이 있는데요. <22>가 중국 ‘위안부’의 죽음을 나열하는 방식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22>라는 영화의 나열이 일종의 애도라고 생각했어요. 영화는 위안부 생존자의 집 내/외부를 많이 보여주는데요. 그럼으로써 ‘위안부’ 생존자 혹은 떠나간 자들이 그 집에 존재하(했)기에 각자의 집이라는 세계들이 생성되고 그러한 집 이미지들이 성좌처럼 연결되면서 ‘위안부’ 들이 드러나는 지점이 그들의 존재를 현재화하지는 않나. 그래서 <22>가 단순히 그들을 피해자로 나열하고 있지만은 않다고 느꼈습니다.


A: <22>는 카메라의 움직임으로도 패닝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이 앞서 말한 영화들이 장면과 장면을 편집으로 이어 붙임으로써 기록물로서의 경향을 가지는 것과는 비교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22>는 중국에서 크게 흥행했다고 하는데요. 한중 합작영화였지만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흥행하지 못했고요. 이 이야기를 듣고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서 ‘위안부' 생존자들이 이제 더 이상은 (증언하지) 못 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에요. 이러한 증언의 방식이 중국의 관객에게는 어떠한 지점으로 다가갔을지가 궁금했어요. 국내에서는 사실 ‘위안부’ 생존자들, 그리고 그들을 다룬 영화가 정제된 언어로 서로의 언어를 교정해 나가면서 적절한 언어를 찾는 것들이 포착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정말 말을 하지 못하겠다며 말하지 않는 영화는 없었다고 생각했거든요.


난둘: A의 말처럼, <22>는 증언불가능성과 그러한 불가능성으로 인해 파생하는 ‘위안부’ 생존자의 언어에 대한 번역(불)가능성 그리고 여성의 재현(불)가능성까지 아우른다는 지점에서, 생존자의 얼굴을 보여주는 방식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체로 무표정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가 지금 저 얼굴을 보면서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하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오히려 이런 고민의 지점을 마련해 주는 것이 ‘위안부’ 역사의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출발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 <22>에서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다 못해 잘리잖아요. 너무 가까워서 정동을 불러일으키고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소격되는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요? ‘위안부’ 생존자가 더는 말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정지된 상태에서의 다가오는 멀어짐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난둘: A의 말을 들으며, 해결불가능성에 대해 다큐멘터리(스트)가 그 불가능성을 해결해 보겠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이라는 영화에서 ‘위안부’ 생존자는 위안소로 쓰였던 장소를 방문하는데요. ‘위안부’ 생존자 여성들은 그 장소에서 전쟁 당시에는 이곳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었고, 침대는 어디에 있었고, 여기에는 누가 머물렀고 등의 정보들을 건조한 태도로 소개한다고 느껴졌어요. ‘위안부’ 여성의 피해 사실을 전시하는 듯한 연출을 택하지 않고, 이런 건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위안부’ 여성의 문제를 (피해 사실을 극화함으로써) ‘위안부’ 여성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지 않는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웹진 ‘결’에서 중국 ‘위안부’ 여성을 다루는 기사들을 읽어보면, 중국의 ‘위안부’ 여성들도 일본군에 잡혀갔었다는 이유만으로 숨어 살거나 피해 사실을 고백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또 마을에서는 일본과 내통했던 중국인 한간이 ‘위안부’ 여성을 끌고 가는데 적극적으로 협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은 삭제되고 산시성이란 마을을 ‘위안부’ 역사를 해결하고자 적극 노력하는 공동체로 비춰지는데요. 그러한 부분이 환원되어 중국이 ‘위안부’ 여성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도와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뉘앙스로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A: 맞아요, 저도 그러한 점에서 마오쩌둥이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그리고 <22>에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난둘이 말한 것처럼 중국의 ‘위안부’들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군수물자처럼 부대가 이동함에 따라 강제로 함께 이동했던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도 몰랐던 이야기였습니다. 부상을 입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고, 다시 끌려가는 경우가 많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여전히 그 마을에 남아 결혼을 하기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했다는 점이요. 이에 비해 조선인 ‘위안부’들은 대부분 고향이나 남한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난둘이 말한 것처럼 중국 ‘위안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면요? 


난둘: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은 중국 감독이지만 일본어로 나레이션을 하면서 시작하잖아요. 영화를 보고 나서 퍼플레이에서 영화 소개글을 보았는데요. 감독은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설명합니다. 앞서 저희가 말하기도 했고 황미요조 연구자의 「[크리틱] 사회적 약자의 표상」에서도 나온 이야기인데, 사회적 약자를 사유할 때 표상 자체보다 종종 더욱 중요할 수 있는 것은 사유하고자 하는,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감독은 끝나지 않는 논쟁을 영화 속에서라도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A: 저도 <오키나와의 할머니>,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22>까지 남성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특질적이기도 하고, 카메라를 든 자가 카메라 앞에 놓인 이들을 대변하는 논리를 통해서 대상을 침묵하게 한다는 점이 앞서 말한 서발턴의 개념과 함께 연결된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보드랍게>(2022), <김복동>(2019), <주전장>(2018), <허스토리>(2018), <아이 캔 스피크>(2017), <귀향>(2016),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9) 등 많은 영화가 남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현상이 신기했어요. 여성은 아무래도 이 주제를 자신이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지 않을까 싶고요. 그리고 앞에서 말한 이 영화들 - <오키나와의 할머니>, <가이산시와 그 자매들>, <22> - 이 감독의 일인칭 나레이션으로서도 시작한다는 점도요. 물론 박수남 감독님의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의 증언> 역시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화장되는 것이지만, 그 영화는 난둘이 말한 대로 다큐멘터리를 통해 관련된 문제를 파헤치고 해결을 해보겠다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그리고 싶은 것> 영화도 특이해요. 남성 감독이 만들기는 했지만 유일하게 영화의 주인공이 ‘위안부' 생존자가 아니라 그림책 작가 권윤덕 님이에요. 영화는 권윤덕 님이 ‘위안부’ 생존자 심달연 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작업 과정과 출판 과정에서 생긴 내용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 작업 과정이 고난한 이유는 일본의 우익 세력이나 천황을 어떻게 재현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남성 동료 편집인들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대화를 촬영하는 방식이 굉장히 특이해요.


난둘: 맞아요, 권윤덕 님은 그 장면에서 욱일기를 그리지 않겠다고 하고, 남성 편집인들은 욱일기는 꼭 그려야 된다고 하면서 논쟁을 이어 가잖아요. 남성 편집인들의 말에서 ‘위안부’ 역사를 피해자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호모소셜한 욕망, 그러니까 한국 사람으로서 조선인 ‘위안부’ 여성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적 테두리 내에서 지켜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들이 욱일기를 꼭 그려야 된다는 주장에서 드러났던 것 같아요. 이러한 남성 편집인들의 민족주의적 사고가 배봉기 님이나 <22>에서 중국 산시성으로 납치된 후 돌아오지 않고 중국인으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한 박차순 님, 이수단 님과 같은 다양한 여성의 맥락이 삭제된다고 생각했어요.


A: 그리고 이 영화에서 ‘위안부' 여성이 재현되는 이미지도 중층적이라는 것이 흥미로워요. 영화의 이미지와 권윤덕 님이 그리는 그림의 이미지, 즉 두 이미지가 영화에 있어요. 권윤덕 님이 그리는 그림의 이미지는 남한의 ‘위안부’가 재현되는 방식과는 달라요. 권윤덕 님이 일본인으로 표상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에 ‘위안부’ 여성을 성애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생각했어요. 남성 편집인들이 이같은 그림을 반대하는 이유도 그러한 재현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던 남성 가해자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어요. 가해자의 재현 방식을 전유하니 항상 피해자로서 대상화되는 여성의 재현은 섹슈얼리티로부터 탈피하게 되고요. 섹슈얼리티가 사라지니 또 맥락이 이해가 안되는 거고요. 그리고 이같은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위안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닿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서 권윤덕 님은 그림책의 직접적인 독자가 될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난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초등학생들이 자신의 소감을 말하는데, 그러한 지점에서 트라우마적 사건을 직접 겪지 못한 포스트 메모리 세대로서 자신만의 상상력을 투입하여 사건을 창조적으로 구축하는 행위, 즉 ‘위안부’ 여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점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소망을 투영하며 보게 되었어요.


A: 초등학교에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침묵>의 마지막 장면들이 생각나기도 했어요. 그래서 한국인 활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는 일본인 활동가들이 국내의 ‘위안부’ 논의에서는 거의 삭제되어 있잖아요. <그리고 싶은 것>에서도 일본 학교를 많이 가고, 사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터뜨리는 사람도 일본인 활동가죠. 권윤덕 님도 역사 교육에 대한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고, 그리고 <침묵>에서도 교육의 일환으로 초등학교에서 이야기를 많이 증언하고, 그것에 감화받는 일본 청중의 모습들이 많이 등장하고요.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공동 역사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이같은 영화들에서 일본을 대하는 당사자들의 문제에 주목하고 싶어요. 한국에서는 재현되지 못하는 모습이요. 그런 모습이 이항 대립으로 나뉘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모두 양립하는 것인데, 이러한 증언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다시 <그리고 싶은 것>으로 돌아와 권윤덕 님도 사실상 구조적인 젠더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크고요. 이러한 지점들이 일본 식민 시기에 있었던 범죄가 아니라 넓은 범위에서의 구조 안에서 젠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들과 달랐다고 생각했어요.


난둘: 영화에서 권윤덕 님은 한지에 그림을 되게 빼곡하게 그리는데, 한지는 종이보다 오래 가잖아요. 그리고 이 그림은 심달연 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재연이고요. 한지라는 매체를 통해서 심달연 님의 증언을 좀 더 오래 붙잡아두고 싶은, 너무 과잉되게 해석하는 것 같지만 그런 시도를 카메라 혹은 시네마라는 매체의 특성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7편의 영화를 통해서 재현불가능성에 대한 지점을 계속해서 얘기했는데, 기지촌과 박인순 님에 대한 김동령⋅박경태 감독님의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와 같은 영화는 이같은 문제를 픽션이라는 방식으로 풀어내잖아요. 이러한 영화적 시도들이 ‘위안부’ 역사를 다룰 때는 어떻게 가능할까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위안부’ 역사에서 이러한 시도 자체가 논의의 경직성으로 인해 어려운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고요. 허윤 연구자는 「일본군 ‘위안부’ 재현과 진정성의 곤경- 소녀와 할머니 표상을 중심으로」에서 1950년대~1960년대는 ‘위안부’ 여성을 성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로 재연해 왔다가 이승연 ‘여인’ 영상집 이후로 섹슈얼리티가 금지되고, 이후 소녀나 할머니와 같은 이분법적으로만 재연되는 상황에 관해 언급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재현 불가능성에 대해 전위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게 돼요.


A: 맞아요. 웹진 ‘결’의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1부〉-〈여명의 눈동자〉부터 〈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에서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언급하잖아요. 20대 여성으로 재현되던 위안부 문제들이 어떻게 90년대 이후에 할머니의 이야기가 되고, 할머니들이 자신이 어렸을 때를 증언하면서 소녀가 되는지요. 그러면서 소녀와 할머니의 순수함을 얘기하는데, 저는 사실 박수남 감독님의 영화 GV에 관객으로 있을 때도 그랬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귀엽다'고 표현을 하는 것들이 싫어요. 그리고 소녀는 오히려 순수함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성애화되어 가는 것들이 극영화 지형 내에 있다고 생각하고요. 증언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지촌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이 증언을 기반으로 하지는 않잖아요. 윤금이 님의 사진이라든가, 저는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증언이 있다고 하더라도 증언 자체로 다루어지지 않는데, 왜 ‘위안부’ 재현의 영화는 말 그대로 부서진 언어를 증언으로써 계속 그 범죄를 증언해야 하는지, 부서진 언어를 재독해하는 방식으로 다시 쌓아 올려질 수는 없는지, 이미지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한 …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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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권은선 외 지음, 김은실 엮음.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휴머니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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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결> 편집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의 재현 〈1부> -〈여명의 눈동자〉부터〈허스토리〉까지, 대중매체를 통해 바라본 일본군‘위안부’ 역사의 재현전략”. 2022.11.27.  https://kyeol.kr/ko/node/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