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지운, 『장화, 홍련』 - 서하나



2023년 8월에 출간된 『장화, 홍련』 (김지운 지음)은 영화 <장화, 홍련> 개봉 20년 만에 최초로 출간된 각본집입니다.
각본집에는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많은 장면이 포함된 오리지널 무삭제 각본, 주요 장면 스토리보드, 미공개 스틸컷이 한데 담겨 있습니다. 오랜 시간 <장화, 홍론>을 기억해 왔던, 그리고 지금 새로이 만나는 관객들에게 큰 선물이 될 책입니다. 

아래 서하나 님의 서평을 공유합니다.



산 사람의 장소가 되지 못한 곳
*영화 <장화, 홍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하나

지리학자 이 푸 투안Yi-Fu Tuan은 공간과 장소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공간Space은 추상적이며, 낯설고, 미완성이며, 아직 경험하지 않은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다. 그에 반해 장소Place는 일상적이고, 실제적이며, 평범한 행위가 발생하는 곳으로 구체성을 띤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은 장소로 채 변화하지 않은 틈새를 장르적으로 이용한다. 온몸이 물에 불은 여자아이는 싱크대 밑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고 ⸻ “싱크대 밑으로 너무나 흉측하게 생긴 어떤 여자아이가 납작하게 웅크린 채 고개를 밖으로 쳐들고 있는 모습이 얼핏 보인다.” 89쪽 ⸻, 기묘한 나방 떼는 커튼에 가려진 창문 위쪽에 붙어 우글거린다. ⸻ “서서히 커튼을 열자 수십 마리의 나방들이 구더기처럼 한쪽 창문 벽에 다닥다닥 붙어 우글거리고 있다.” 93쪽. 여느 공포 영화가 그렇듯 닫힌 것을 열거나 가려진 것을 걷으면 그곳에 미지의 무언가가 등장한다.

<장화, 홍련>의 문들이 열릴 때마다 형태를 드러내는 건 수미 자신의 죄의식과 적개심이다. 나아가 공포의 근원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임을 확인하고 나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뒤틀린다. 관객이 지금까지 보아온 장면들은 대체 누구의 시선인가? 어떤 파편들을 이어야 연속성을 갖게 되는가? 틈새가 전체를 집어삼키고, 상상과 기억과 현실, 그리고 죽은 자의 혼이 중첩된 장소는 더 이상 투안이 말한 장소성을 잃는다. 수미가 지키려 했던 이 ‘집’ ⸻ “수미: 그렇지 않을걸. 당신이 이 집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거야.” 105쪽 ⸻ 을 더 지탱할 수 없게 된 순간 수미는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종결하려 한다. ⸻ “수미, 무현과 은주를 동시에 번갈아 보더니 씨익 웃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알약을 입 안에 넣는다.” 137쪽.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재생하려던 시도가 무너진 셈이다.

김지운 감독이 각본에서 묘사한 수미의 집에서 김기영 감독의 <하녀>나 오즈 야스지로의 많은 영화를 떠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넓고 독특한 구조의 거실과 주방,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현관에 바짝 붙어 있고 1층에는 각방으로 통하는 좁다란 마루 복도가 연결되어 있다.유난히 문이 작고 많다는 느낌이 들고 전체적으로 앤틱한 분위기를 띠는 목재 재질의 일본식 가옥구조다.” 37-38쪽

하지만 <장화, 홍련>의 가옥은 목재 특유의 텁텁함을 덜어내고 피와 곰팡이 같은 음습한 기운을 길어 더한다. 윌리엄 모리스의 패턴 벽지는 꽃의 아름다움을 어딘가 기기괴괴하게 변모시키고, 각본에서도 꽃의 빛깔은 물에 닿아 번진다. ⸻ “남자가 찻잔을 들고 온다. 박 순경 앞에 차를 따라 내민다. 꽃잎 차를 처음 보는 박 순경이 차 위에 둥둥 떠 있는 마른 장미 꽃잎을 신기한 듯 바라본다.” 38쪽.
비록 수연의 죽음은 물과 관계되지 않지만, 장화홍련전 속 장화와 홍련은 물에 빠져 죽으므로 영화 <장화, 홍련>의 공기는 습하고 그곳의 원혼이 내민 손은 ‘부어’ 있지 않고 ‘불어’ 있다. ⸻ “이불 사이로 퉁퉁 불은 손이 쓰윽 하고 나오더니 어떤 여자아이의 머리통이 나온다.” 150쪽.
이 가옥의 온갖 틈새에서는 종내 원혼이 출몰한다. ⸻ “환하게 불이 켜진 주방, 냉장고에 조금 가려진 한쪽 벽에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 같은 게 들리더니 느닷없이 벽에서부터 머리를 양옆으로 딴 어떤 여자애가 너무나 느린 속도로 천천히 가로질러 간다.” 144쪽 ⸻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김지운 감독이 “두 자매에게 단 한 점의 희망을 얘기해 주지 못한 게 마음의 짐이 되었다”고 회고하듯 <장화, 홍련>의 끝에는 한 줄기의 생도 없다. 자매의 깊고 선명한 이야기가 담긴 이 각본은 김지운 감독이 두 원혼의 자리를 얼마나 충실히, 공들여 빚었는지 보여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