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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서신
올리브 나무와 돌멩이해파리에게,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저와 서신교환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과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 이외에 우리 둘 사이에 또 어떤 공통 분모가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 편지로 차차 알아가면 되겠죠.
“눈도 코도 없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해파리와 영화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무턱 보낸 이메일이 본 서신교환의 시발점입니다. 서간체 형식이 영화비평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건 조너선 로젠봄, 애드리언 마틴, 켄트 존스, 니콜 브레네즈, 알렉산더 호바트가 공동 집필한 Movie Mutations: The Changing Face of World Cinephilia입니다. 조너선 로젠봄과 켄트 존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애드리언 마틴은 본인도 한때 각종 이론으로 중무장한 다분히 투박한 글을 썼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애드리언, 너가 평소에 편지를 쓰는 것처럼 영화 글을 써보는 건 어때?’라며 넌지시 던진 말을 듣고 비평을 러브레터처럼 쓰기 시작했다는 그의 회상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가끔은 저도 비평을 쓸 때 어머니가 독자라고 생각하며, 편지를 쓰듯 원고 작업을 하곤 합니다. 비록 영어로 쓰여있어서 어머니는 읽지 못하지만… 보내지 못한 편지도 하나의 장르라면 장르니까요.
아시다시피, 본래 계획은 올해 열리는 뉴욕 영화제에서 상영될 영화들을 중심으로 편지를 써나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9월 초, 뜻을 함께하는 뉴욕의 영화인들 사이에서 뉴욕 영화제를 주최하는 기관인 링컨센터를 보이콧하자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러고는 뉴욕 영화제에 대항해 뉴욕 반(反)영화제(New York Counter Film Festival) 기획이 물살을 타고 이루어졌습니다. 반영화제 측이 요구하는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링컨센터 산하의 부속기관인 필름 앳 링컨센터(Film at Lincoln Center, 이하 FLC)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서를 즉각 발표할 것. 2)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한 공권력 남용을 중단할 것. 3) 집단학살을 옹호 및 정당화하는 친’이스라엘’계 단체 및 인사들의 후원을 거절할 것.
작년 10월 7일 이후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레바논 등지에서 미국과 유럽의 전폭적인 원조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군이 자행해 온,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폭력의 역사를 구구절절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10월 7일 이후'만을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팔레스타인이 통과해 온 지난 500년을 탈역사화하는 것이겠군요. 지난 12월 9일 ‘이스라엘'군에 의해 암살당한 팔레스타인 시인 레파트 알라리르는 생전 (지금은 파괴되어 버린) 가자 이슬람 대학교에서 진행하던 영어 시 수업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기 한참 전에 이미 시온주의자들이 시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고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이건 비단 시라는 매체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죠. 소설이든, 연극이든, 회화든, 영화든, 제국주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모순의 논리를 강요하니까요.
가자 지구, 그리고 이제는 베이루트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참상을 담은 이미지들이 온라인상에 범람하는 이때, 저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이미지는 ‘이스라엘'군이 콧노래를 불러가며 불태워버리는 올리브 나무를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내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지금껏 시온주의자들이 불태운 올리브 나무 중에는 그 자리를 1000년 가까이 지키던 개체도 있다고 합니다.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와 갖는 유대관계를 함축해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며 수호하려 하는 것은 그 유대관계뿐만 아니라, 대지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수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영화가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요? 이런 지면에서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하지만 거의 근 1년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는 질문입니다. 고다르는 <영화사(들)> 연작에서 영화가 ‘시간의 쉼터'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쉼터라… 폭격을 간신히 피한 여덟 살 남짓한 팔레스타인 소년이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경험을 증언해야만 할 때, 그리고 그 증언만이 그들의 존재와 처한 상황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텍스트가 될 때, 그 이미지를 목도하며 집단 학살의 목격자가 되는 우리들은 어떤 시간의 쉼터를 마련해야 하는 걸까요?
지난 9월 20일, 이제 막 기자 시사회가 시작된 뉴욕 영화제에서 10월 7일 이후의 가자 집단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No Other Land>의 상영이 있었습니다. 시사회 불과 몇 시간 전, 공동연출자 중 한 명인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실 아드라의 부친이 ‘이스라엘'군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뉴욕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집단학살을 수행하는 이들의 지갑에 돈을 채워주는 작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운영되는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접해야 한다는 모순이 주는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보이콧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고요.
1950년대, 링컨센터 건립을 위해 록펠러 제단과 손잡은 뉴욕시 정부는 산후안 힐(San Juan Hill)에 거주하던 흑인 및 푸에토리코인 1만 7천여 명을 강제 이주시켜 버립니다. 어쩌면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사례. 이 동네는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배경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스필버그의 리메이크 버전의 뉴욕 프리미어 상영이 개최된 곳이 링컨센터였다는 것은 가혹한 아이러니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규모 증설 계획을 갖고 있는 링컨센터는 올해 초 걸출한 흑인 다큐멘터리 감독 스탠리 넬슨에게 <San Juan Hill: Manhattan’s Lost Neighborhood>의 제작을 맡겼습니다. 이 영화도 올해 뉴욕 영화제 상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추잡한 과거를 가진 문화예술 기관들이 그 더러운 역사를, 예술을 빌려 표백하는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집단학살이 가자지구에서 레바논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링컨센터가 돈과 공권력을 이용해 밀어내 버렸던 이들의 경험과 시간을 홍보 수단으로 전유하는 추태는 차마 못 보겠어요. 대신 팔레스타인 영화들의 상영이 대거 계획된 반영화제에 참석해 그들에게 시간의 쉼터를 내주려 합니다. 제 삶의 시간을 이 영화들을 보는 데 할애한다고 집단학살을 멈추는데 기여한다는 망상 따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자 지구, 그리고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을 봉쇄해 버리기 위해 세워진 담을 넘어 지금 제가 있는 여기까지 도달한 영화들이 품고 있는 팔레스타인 억압의 역사, 그리고 해방을 염원하는 시간에 쉼터를 제공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자란 무엇인가』에서 오카 마리는 말합니다. “봉쇄라는 것은 구조적 폭력입니다. 사실 전쟁에서 벌어지는 직접적인 폭력만큼이나 치명적인 폭력이지만 폭격 같은 직접적인 폭력과 달리 그것에 의해 직접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폭력성을 단순하게 알 수 없는 거죠.” 며칠 후에 시작될 반영화제에서 조우하게 될 영화들. 에드워드 사이드가 살아생전 레바논 국경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던진 돌멩이. 저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편지가 강에서 바다까지, 뉴욕에서 서울까지 무사히 닿길 바라며.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저와 서신교환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과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 이외에 우리 둘 사이에 또 어떤 공통 분모가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 편지로 차차 알아가면 되겠죠.
“눈도 코도 없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해파리와 영화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무턱 보낸 이메일이 본 서신교환의 시발점입니다. 서간체 형식이 영화비평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건 조너선 로젠봄, 애드리언 마틴, 켄트 존스, 니콜 브레네즈, 알렉산더 호바트가 공동 집필한 Movie Mutations: The Changing Face of World Cinephilia입니다. 조너선 로젠봄과 켄트 존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애드리언 마틴은 본인도 한때 각종 이론으로 중무장한 다분히 투박한 글을 썼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애드리언, 너가 평소에 편지를 쓰는 것처럼 영화 글을 써보는 건 어때?’라며 넌지시 던진 말을 듣고 비평을 러브레터처럼 쓰기 시작했다는 그의 회상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가끔은 저도 비평을 쓸 때 어머니가 독자라고 생각하며, 편지를 쓰듯 원고 작업을 하곤 합니다. 비록 영어로 쓰여있어서 어머니는 읽지 못하지만… 보내지 못한 편지도 하나의 장르라면 장르니까요.
아시다시피, 본래 계획은 올해 열리는 뉴욕 영화제에서 상영될 영화들을 중심으로 편지를 써나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9월 초, 뜻을 함께하는 뉴욕의 영화인들 사이에서 뉴욕 영화제를 주최하는 기관인 링컨센터를 보이콧하자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러고는 뉴욕 영화제에 대항해 뉴욕 반(反)영화제(New York Counter Film Festival) 기획이 물살을 타고 이루어졌습니다. 반영화제 측이 요구하는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링컨센터 산하의 부속기관인 필름 앳 링컨센터(Film at Lincoln Center, 이하 FLC)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서를 즉각 발표할 것. 2)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한 공권력 남용을 중단할 것. 3) 집단학살을 옹호 및 정당화하는 친’이스라엘’계 단체 및 인사들의 후원을 거절할 것.
작년 10월 7일 이후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지구, 레바논 등지에서 미국과 유럽의 전폭적인 원조를 등에 업고 ‘이스라엘’군이 자행해 온,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폭력의 역사를 구구절절 얘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10월 7일 이후'만을 언급하는 것이야말로 팔레스타인이 통과해 온 지난 500년을 탈역사화하는 것이겠군요. 지난 12월 9일 ‘이스라엘'군에 의해 암살당한 팔레스타인 시인 레파트 알라리르는 생전 (지금은 파괴되어 버린) 가자 이슬람 대학교에서 진행하던 영어 시 수업에서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기 한참 전에 이미 시온주의자들이 시를 통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고 말합니다. 팔레스타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이건 비단 시라는 매체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겠죠. 소설이든, 연극이든, 회화든, 영화든, 제국주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 모순의 논리를 강요하니까요.
가자 지구, 그리고 이제는 베이루트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참상을 담은 이미지들이 온라인상에 범람하는 이때, 저의 뇌리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이미지는 ‘이스라엘'군이 콧노래를 불러가며 불태워버리는 올리브 나무를 목숨을 바쳐가며 지켜내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지금껏 시온주의자들이 불태운 올리브 나무 중에는 그 자리를 1000년 가까이 지키던 개체도 있다고 합니다.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와 갖는 유대관계를 함축해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며 수호하려 하는 것은 그 유대관계뿐만 아니라, 대지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수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니, 영화가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한 걸까요? 이런 지면에서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하지만 거의 근 1년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는 질문입니다. 고다르는 <영화사(들)> 연작에서 영화가 ‘시간의 쉼터'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의 쉼터라… 폭격을 간신히 피한 여덟 살 남짓한 팔레스타인 소년이 공포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핸드폰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경험을 증언해야만 할 때, 그리고 그 증언만이 그들의 존재와 처한 상황을 증명해 줄 수 있는 텍스트가 될 때, 그 이미지를 목도하며 집단 학살의 목격자가 되는 우리들은 어떤 시간의 쉼터를 마련해야 하는 걸까요?
지난 9월 20일, 이제 막 기자 시사회가 시작된 뉴욕 영화제에서 10월 7일 이후의 가자 집단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No Other Land>의 상영이 있었습니다. 시사회 불과 몇 시간 전, 공동연출자 중 한 명인 팔레스타인 활동가 바실 아드라의 부친이 ‘이스라엘'군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뉴욕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집단학살을 수행하는 이들의 지갑에 돈을 채워주는 작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운영되는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접해야 한다는 모순이 주는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보이콧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고요.
1950년대, 링컨센터 건립을 위해 록펠러 제단과 손잡은 뉴욕시 정부는 산후안 힐(San Juan Hill)에 거주하던 흑인 및 푸에토리코인 1만 7천여 명을 강제 이주시켜 버립니다. 어쩌면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사례. 이 동네는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배경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스필버그의 리메이크 버전의 뉴욕 프리미어 상영이 개최된 곳이 링컨센터였다는 것은 가혹한 아이러니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규모 증설 계획을 갖고 있는 링컨센터는 올해 초 걸출한 흑인 다큐멘터리 감독 스탠리 넬슨에게 <San Juan Hill: Manhattan’s Lost Neighborhood>의 제작을 맡겼습니다. 이 영화도 올해 뉴욕 영화제 상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추잡한 과거를 가진 문화예술 기관들이 그 더러운 역사를, 예술을 빌려 표백하는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집단학살이 가자지구에서 레바논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링컨센터가 돈과 공권력을 이용해 밀어내 버렸던 이들의 경험과 시간을 홍보 수단으로 전유하는 추태는 차마 못 보겠어요. 대신 팔레스타인 영화들의 상영이 대거 계획된 반영화제에 참석해 그들에게 시간의 쉼터를 내주려 합니다. 제 삶의 시간을 이 영화들을 보는 데 할애한다고 집단학살을 멈추는데 기여한다는 망상 따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가자 지구, 그리고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을 봉쇄해 버리기 위해 세워진 담을 넘어 지금 제가 있는 여기까지 도달한 영화들이 품고 있는 팔레스타인 억압의 역사, 그리고 해방을 염원하는 시간에 쉼터를 제공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자란 무엇인가』에서 오카 마리는 말합니다. “봉쇄라는 것은 구조적 폭력입니다. 사실 전쟁에서 벌어지는 직접적인 폭력만큼이나 치명적인 폭력이지만 폭격 같은 직접적인 폭력과 달리 그것에 의해 직접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폭력성을 단순하게 알 수 없는 거죠.” 며칠 후에 시작될 반영화제에서 조우하게 될 영화들. 에드워드 사이드가 살아생전 레바논 국경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던진 돌멩이. 저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편지가 강에서 바다까지, 뉴욕에서 서울까지 무사히 닿길 바라며.
2024년 9월 24일
한겨울 드림
한겨울 드림
P.S. - 편지를 부치고 얼마 안 있어 현재 뉴욕영화제에 작품이 걸려 있거나 과거에 출품한 전력이 있는 영화인들이 서명한 공개서한이 Screen Slate에 업로드되었습니다. 바실 아드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마이크 리, 페기 아이쉬, 스카이 호핀카를 포함한 100여 명의 영화인들이 한목소리로 FLC가 뉴욕영화제의 스폰서이자 '이스라엘'의 인종학살과 정착형 식민주의에 자금을 대주는 블룸버그 재단과의 절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친팔레스타인계 영화인들의 모임인 Film Workers For Palestine에서는 2025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의 공식 불매운동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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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답신
겨울 님에게,
덕분입니다. 그리고 저희 역시 묵념으로부터 이 편지를 시작합니다.
사실, 저희는 사라지려고 했어요. 마지막 글을 썼다고 생각했거든요. 더는 계속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해파리의 메일함에 도착한 세 번째 알람. 겨울 님의 메일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는 뉴욕 영화제(New York Film Festival)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어요. 뉴욕 영화제라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1세계 중심의 영화제 서킷에 관해 이야기하자고요. 국내에서는 비교적 잘 논의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명망 있는 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 유통, 배급과 국제적인 작가로서의 가시성, 그리고 영화 제작자로서의 보조금 문제와 생산 구조에 깊이 얽혀 있는 영화제에 대해 말입니다. 마켓과 무한 경쟁으로의 피칭 시스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답습하는 국내의 국제영화제도요.
그러나 ‘긴급한 요청’에 따라 우리는 뉴욕 반(反)영화제(New York Counter Film Festival)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에 연대하는 뉴욕의 예술가들이 친이스라엘계 자본으로 운영되는 뉴욕영화제와 영화제를 주관하는 링컨센터에 대한 보이콧으로 뉴욕영화제 기간에 뉴욕반영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씀해 주셨죠. 그리고 우리는 언제라도 팔레스타인에 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자격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겨울 님이 공유해 주신 뉴욕반영화제와 팔레스타인 관련 영화 색인 데이터를 살펴보며, 우리가 현실의 잔인한 폭력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곳에는 끔찍한 인종 말살과 전쟁 범죄가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카메라와 이미지가 그 폭력에 복무합니다. 역설적인 것은 폭력에 복무하는 이미지들은 종국에는 남루한 증거로 남아버린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입니다. 편지를 쓰는 10월 7일, ‘10월 7일 이후’를 언급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통과해 온 지난 500년을 탈역사화”한다는 겨울 님의 말에 깊이 동의합니다. 하마스가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를 공격했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고 믿어지는 절대적 반(半)의 세계에서 “하마스 공격”이라는 말은 유효한 말이 될 수 있을까요? 겨울 님께서도 언급해 주신 『가자란 무엇인가』에서 오카 마리는 이렇게 말하죠. ‘폭력의 연쇄’, ‘증오의 연쇄’라는 말로 이 사태를 보도하는 것은 범죄적이라고 생각한다고요. 이는 결국 “사건을 ‘남의 일’로 만들고, 목소리를 내지 않고 무관심한 쪽에 머물도록 만들어”1버리고,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행위를 향한 “묵인”2과 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랜 국제사회의 이중 잣대”3라고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대니 로젠버그(Dani Rosenberg)의 <개와 사람에 관하여>(2024)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스라엘’의 문화워싱에 반대하는 보이콧으로 상영이 취소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 노트는 이 영화를 “2023년 10월 하마스 공격 당시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자신이 살던 키부츠에 돌아간다.”, “현실을 그대로 담기 위해 하마스 공격 약 1달 후 가자지구 경계에 있는 키부츠에서…”라는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어요. 감독의 인사 영상에서는 전작 <사라진 소년병>(2023)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2023년 10월 7일의 푸티지가 등장합니다. 끔찍한 전쟁이 시작됐다는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아내와 아이의 사진이, 그리고 위급했던 당시를 증언하듯 가족과의 핸드폰 메세지가 실제 화면으로 구성되죠. 그렇게 그는 작년 10월 9일 부산에서 홀연히 떠났고, 우리는 이에 대한 서정적 어조의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0월 3일 ‘팔레스타인 문화 연대’의 움직임으로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문화워싱에 반대하는 문화예술인 일동’의 이름으로 <개와 사람에 관하여>의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연명이 있었습니다. 연명을 요구하는 선언은 해당 영화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군과 하마스의 공격의 구조적 원인을 드러내는 대신 개인의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으며, 식민지와 피식민자의 관계를 대칭으로 보며 동등한 ‘분쟁'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문화워싱에 해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연명과 함께 상영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10월 3일 자로 예정되어 있던 감독의 GV는 직전에 급하게 취소되었습니다. 빈 무대에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한다는 의미의 ‘캐피예’를 두른 활동가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날 것을 요구받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영화제 측의 경호원들이 상영관 안으로 들어와 장내를 정리했어요. 그로부터 이틀 뒤인 10월 5일 감독의 “정면돌파”에 따라 GV는 진행되었습니다. 베니스영화제 당시에도, 감독은 이 영화를 보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부산에서 보지 않고 돌아온 것이 후회됩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를 결코 보러 갈 수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아야만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장소가 영화제여야 했던 걸까요? 만약 영화제가 자신들의 프로그래밍에 대한 어떠한 정치적 입장과 아젠다도 없다면 영화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보면 상영에 관한 선택 자체가 입장이겠지요. 올해 한국에서 개최된 또 다른 영화제인 디아스포라영화제의 개막작은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이주한 유대인 친구를 만나러 가며 벌어지는 갈등과 그러한 갈등으로 하여금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폭력에 관한 팔레스타인계 스위스인 감독 이반 야그치(Yvann Yagchi)의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2024)이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가까운 시기에 개최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폐막식에서는 레바논 국적의 심사위원의 메시지가 스크린에 상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2014년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있었습니다. EBS국제다큐영화제는 ‘이스라엘 특별전’을 준비했고, 당시 영화인들은 해당 영화제를 보이콧하는 ‘영화인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언뜻 지금의 상황과 비슷해 보이지만, 우리는 이때의 영화인 성명서와 지금의 세태가 같다고는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뉴욕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요? 겨울 님의 설명처럼, 뉴욕영화제는 “1) 링컨센터 산하의 부속기관인 필름 앳 링컨센터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강력히 규탄하는 성명서를 즉각 발표할 것. 2)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한 공권력 남용을 중단할 것. 3) 집단학살을 옹호 및 정당화하는 친‘이스라엘’계 단체 및 인사들의 후원을 거절할 것.”이라는 뉴욕반영화제의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나요?
관련된 여러 글을 돌아다니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있었던 성명에 대한 로라 스타브(Laura Staab)의 「Call and Response: The 2024 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을 읽었습니다. 그는 세르주 다네(Serge Daney)를 인용하면서, 시네필리아는 ‘영화를 통한 세계와의 관계’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관계는 지속적인 협상의 과정을 통해 맺어져야만 한다고 하죠. 그는 독일의 Erinnerungskultur(기억의 문화)와 Staatsräson(국가이성)이 ‘이스라엘'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는 이상 “전 세계 전쟁, 파괴 및 억압의 희생자를 기억하며 이러한 연민(Sympathy)을 중동 및 기타 지역의 ‘인도주의적’ 희생자들에게로 확대한 베를린 영화제”는 오직 퇴행적인 아버지의 역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다르와 고랭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으로 함께 팔레스타인 투쟁에 관한 영화를 작업하던 중에 쓰여진 「Jusqu’à la victoire」를 읽었습니다. 글은 정치적 전선과 예술적 전선의 모순에 관해서 기술하는데요. 그들은 제국주의적 이미지에 맞서 팔레스타인 해방과 혁명에 관한 이미지(영화)들이 어디에서 상영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저희는 이 글에 관한 겨울 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신 <여기 그리고 그밖에>(1976)에 관해서도요.
너무 많이 보여짐으로써 은폐되고 호도되는 역설적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보여짐으로써 사라져 버리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쇼아를 통해 이미지의 윤리를 배웠습니다. 그렇게 이미지의 윤리를 통해 세계의 윤리를 익혔습니다. 쇼아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식민지 찬탈 이후 우리 모두는 무엇을 말할 수 있게 될까요?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 앞에서요. 로절린드 나샤쉬비(Rosalind Nashashibi)의 <Electrical Gaza>(2015)는 가자지구의 풍경을 담습니다. 애니메이션과 실제 카메라로 촬영된 이미지는 오랜 시간 고립된 가자 지구에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과 달리 고요하고 평온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은 봉쇄된 길목에서 등장하는 검은 원으로 인해 삼켜집니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검은 원은 순간적으로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저 검은 원이 영화의 풍경을 모두 집어삼켜 버린다면. 검은 원은 동시에 보는 이의 신체 또한 순간적으로 멈추도록 만듭니다. 고요한 진공 상태가 지속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응이 고다르가 말하는 영화에서 가능한 ‘시간의 쉼터’가 될 수 있을까요?
오카 마리의 책에는 “팔레스타인이 해방되면 세계가 해방된다”4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즉각적인 종전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사태 앞에서 영화는 그리고 이미지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겨울님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리해야 할 과제일 것 같습니다.
강에서 바다까지, 서울에서 뉴욕까지 이 편지가 잘 닿기를 바랍니다.
2024년 10월 10일
해파리 드림
해파리 드림
P.S. 겨울님이 추신에 남겨 주신 “Open Letter to the New York Film Festival to End Complicity in Israeli War Crimes”에서 뉴욕영화제가 ‘이스라엘’ 국가 건설 자금 지원 프로젝트를 운영해 정착 인프라를 촉진하고, 블룸버그 통신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폭격에 관해 ‘이스라엘’에 유리한 정보를 전달하는 블룸버그 자선재단(Bloomberg Philanthropies)와 파트너십을 맺은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룸버그 자선재단을 구글링해보면 ‘이스라엘’이나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Bloomberg Philanthropies, Israel, Palestine을 검색란에 동시에 입력해도 Forbes, Bloomberg.com, Bloomberg Philanthropies에서 올린 기사들이 첫 번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어요. 눈 가리고 아웅식의 전략이기는 하나 정보 과잉 시대에 스캐닝과 스키밍이 습관이 된 사용자에게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와는 정반대의 전략을 취하는 겨울님과 저희의 서신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레바논 국경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던진 돌멩이처럼 서로에게 정박할 수 있을까요?
1) 오카 마리, 『가자란 무엇인가』, 두번째테제, 김상운 번역. 2024, 38p.
2) 위의 책, 39p.
3) 같은 책, 40p.
4) 같은 책, 11p.
2) 위의 책, 39p.
3) 같은 책, 40p.
4) 같은 책,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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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서신
... 그리고 팔레스타인해파리에게,
제가 있는 브루클린에 퍽 차디찬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8월의 어떤 날처럼 극장 안이 너무 춥지는 않을지 얇은 가디건을 가방 안에 쑤셔 넣는 일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날씨의 변화로 새삼 느끼는 시간의 흐름. 네, 가자 지구 대학살도 1년이라는 시간을 넘기며 그 폭력의 범위가 레바논으로 확산하였고, 미국-’이스라엘'과 이란과의 전면전도 불가피해 보이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선을 불과 일주일 남짓 앞둔 미국에 도착한 추풍낙엽이 여느 때처럼 반갑지 않은 데에는 거기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답신이 도착했을 때, 뉴욕반영화제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린 시점이었습니다. 반영화제 자체와는 별개로 링컨센터와 뉴욕영화제를 보이콧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습니다. 혹자는 반영화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성에는 동의하나, 영화제 개막이 임박해서 진행된 보이콧의 정치적 파급효과에 의혹을. 혹자는 링컨센터와 뉴욕영화제가 보이콧 대상이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뉴욕 영화씩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이들이 연이어 SNS에 반영화제를 향한 비아냥과 조롱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양태를 지켜보며,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게 좌초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반영화제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라고 저는 전하고 싶어요. 반영화제 기간 중 진행된 대부분의 상영회는 만석을 이루었고 자리를 함께했던 몇몇 동지들과 새로운 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뭐랄까요, 정성일 선생님을 주축으로 하는 한국의 90년대 씨네필 세대가 줄곧 얘기하는 ‘영화의 친구들'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영회들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던 거와는 별개로 뉴욕영화제 보이콧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뉴욕영화제 출품을 취소한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나마도 로절린드 나샤쉬비의 신작인 <The Invisible Worm>을 뉴욕영화제 프리미어보다 며칠 앞서 상영할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고요. 대신 팔레스타인과 연대할 것을 외치며 올해 열렸던 베를린 영화제와 작년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을 거절했던 작가들의 작품들과 더불어 제국주의와 국경을 넘은 정치적 연대에 사유해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상영했습니다.
반영화제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Pasolini Pa* Palestine>은 파졸리니가 <마태복음> 촬영을 준비하며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방문했던 팔레스타인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1964년과 2005년 사이 40여 년을 통과해 온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사유합니다. 영화 내내 감독인 아이린 안나스타스(Ayreen Anastas)와 가상의 ‘파졸리니'가 화면 밖의 내레이터로 등장하여 팔레스타인의 ‘비포-에프터' 풍경의 이미지를 주제 삼아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는데요. 한 인터뷰에서 안나스타스는 팔레스타인 방문 당시 충격적일 정도로 ‘비정치적인' 파졸리니가 아니라, 인도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살로 소돔의 120일>을 만들어낸 ‘막시스트' 파졸리니를 다시 한번 팔레스타인에 소환시키고자 본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술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체크포인트에서 검문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모습을 담음 쇼트를 마지막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풍경을 역사의 지질학적 장소로 다루는 듯합니다. 단순히 40년 전과 현재의 차이점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황량한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곳을 휩쓸고 갔을 게 분명한 제국주의 폭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건설될 수 있는 해방된 팔레스타인과 올리브 나무의 모습을, 또 파졸리니가 신약성서를 매게 삼아 물질화하고자 했던 신화적 가능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간의 쉼터는 어쩌면 망각의 위기에 놓인 ‘이미 일어난' 역사의 파편들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나야만' 하는 가능성의 파편들 또한 품어야 하는 게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이 검은 원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을 서술한 것을 읽으며 고다르의 <여기 그리고 그밖에>에 쉬지 않고 등장하는 검은 화면을 떠올렸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PFLP) 관한 다큐멘터리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를 연출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총자루를 손에 쥐기까지 했던 아다치 마사오는 고다르의 검은 화면(tableau noir)이 시사하는 것이 이미지의 수동적 침묵이 아닌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를 제대로 보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 반드시 경유해야 할 ‘제로'의 상태라고 얘기합니다. 고다르가 1970년에 요르단에 거주하며 16mm 촬영한 해방 운동의 파편들을 프랑스로 가져와 아날로그 비디오 이미지들과 병치한 <여기 그리고 그밖에>야 말로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두 번째 데뷔작이 아닐까요? 여기서 고다르는 정치적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 가의 문제, 그리고 이미지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볼 것인 가의 문제와 더불어 영화의 형식 자체가 가진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점을 탐구합니다.
16mm로 촬영된 분량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전우들이 살해된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라 결론지은 듯 해요 어쨌든 영화는 하나의 쇼트가 지나가면 그 자리를 다음 쇼트가 메우는 선형적 구조를 가졌음을 탄식하며, 그 구조가 우리가 역사를 서술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다르는 지적합니다. 마치 그 한계점을 타파하려는 듯 아날로그 비디오 편집 기술의 힘을 빌려 복수의 이미지를 중첩하는 데서, 우리는 고다르가 이미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인생)> 이전부터 비디오를 영화와 영화사, 그리고 20세기(그는 <영화사(들)> 연작에서 영화사=20세기사라고 못 박았습니다.)를 사유하고 비평하는 도구로 사용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여기 그리고 그밖에>를 재관람하며 저를 가장 감동하게 한 부분은 (세르주 다네가 지적했듯) 고다르가 본 영화가 던지는 영화 형식에서의 ‘그리고(et)'라는 문제와 이후에도 끈질기게 씨름하며 <언어와의 작별>에 이르러선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에요. 3D 상업영화의 필수 요소인 양안 시차 거리를 과감하게 버린 그가 택한 방법론은 왼눈과 오른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분리ᐧ해체하며 관객 본인이 스스로 그 파편들을 중첩하거나 몽타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몽타주는 고다르의 ‘멋진 근심'에서 관객이 정치적 주체로서 역사 ‘그리고' 이미지 사이를 어떻게 바라볼지의 과제로 해방된 듯합니다.
여러분 말대로 우리는 쇼아를 통해 이미지의 윤리를 배웠고, 또 그를 통해 세계의 윤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옆에 ‘그리고'라는 단어를 절대 붙이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유일무이하고 세계사의 그 어떤 학살과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졸렬한 식민지주의 논리에 정치적ᐧ윤리적 아이언 돔을 설치합니다. 미국에서는 이걸 ‘집단학살의 독점화'라고 표현하는데요. 홀로코스트 이후에 서정시란 불가능하다는 테제, 이제는 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19세기 남북전쟁을 치른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을 린칭한 뒤 나무에 매달아 교사형 시키는 일을 마치 서커스 구경하듯, 마을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크닉을 하며 ‘관람'하곤 했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린칭의 참상을 담은 사진이나 삽화가 그려진 엽서를 보내는 것이 백인들 사이에선 유행이었고요. 트위터에는 경찰의 과잉 진압에 희생되는 흑인들의 바디캠 이미지가 언제나 넘쳐납니다. 그래도 백인들은 서정시도 잘 써왔고, 1915년에는 <국가의 탄생>도 만들어냈죠. 물론 홀로코스에 희생된 이들과 유가족들도 같은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홀로코스트가 갖는 특권적 위치를 이제는 박탈해야 할 때가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뿐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세계사의 유일한 쇼아도 아니며, 재현의 윤리와 이미지의 정치학 문제에 있어서 단일한 척도가 되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재현될 수 있는 가라는 질문, ‘그리고' 클로드 란츠만과 라즐로 네메스가 시온주의자라는 사실이 내포하는 참담한 정치적 함의. 이 둘을 함께 고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강에서 바다까지, 뉴욕에서 서울까지 이 편지가 잘 닿기를 바라며.
제가 있는 브루클린에 퍽 차디찬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8월의 어떤 날처럼 극장 안이 너무 춥지는 않을지 얇은 가디건을 가방 안에 쑤셔 넣는 일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날씨의 변화로 새삼 느끼는 시간의 흐름. 네, 가자 지구 대학살도 1년이라는 시간을 넘기며 그 폭력의 범위가 레바논으로 확산하였고, 미국-’이스라엘'과 이란과의 전면전도 불가피해 보이는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선을 불과 일주일 남짓 앞둔 미국에 도착한 추풍낙엽이 여느 때처럼 반갑지 않은 데에는 거기서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답신이 도착했을 때, 뉴욕반영화제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막을 내린 시점이었습니다. 반영화제 자체와는 별개로 링컨센터와 뉴욕영화제를 보이콧하는 문제를 두고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습니다. 혹자는 반영화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성에는 동의하나, 영화제 개막이 임박해서 진행된 보이콧의 정치적 파급효과에 의혹을. 혹자는 링컨센터와 뉴욕영화제가 보이콧 대상이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을. 뉴욕 영화씩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이들이 연이어 SNS에 반영화제를 향한 비아냥과 조롱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양태를 지켜보며,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게 좌초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반영화제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라고 저는 전하고 싶어요. 반영화제 기간 중 진행된 대부분의 상영회는 만석을 이루었고 자리를 함께했던 몇몇 동지들과 새로운 우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뭐랄까요, 정성일 선생님을 주축으로 하는 한국의 90년대 씨네필 세대가 줄곧 얘기하는 ‘영화의 친구들'을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영회들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던 거와는 별개로 뉴욕영화제 보이콧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뉴욕영화제 출품을 취소한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그나마도 로절린드 나샤쉬비의 신작인 <The Invisible Worm>을 뉴욕영화제 프리미어보다 며칠 앞서 상영할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고요. 대신 팔레스타인과 연대할 것을 외치며 올해 열렸던 베를린 영화제와 작년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을 거절했던 작가들의 작품들과 더불어 제국주의와 국경을 넘은 정치적 연대에 사유해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상영했습니다.
반영화제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Pasolini Pa* Palestine>은 파졸리니가 <마태복음> 촬영을 준비하며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방문했던 팔레스타인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1964년과 2005년 사이 40여 년을 통과해 온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사유합니다. 영화 내내 감독인 아이린 안나스타스(Ayreen Anastas)와 가상의 ‘파졸리니'가 화면 밖의 내레이터로 등장하여 팔레스타인의 ‘비포-에프터' 풍경의 이미지를 주제 삼아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는데요. 한 인터뷰에서 안나스타스는 팔레스타인 방문 당시 충격적일 정도로 ‘비정치적인' 파졸리니가 아니라, 인도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살로 소돔의 120일>을 만들어낸 ‘막시스트' 파졸리니를 다시 한번 팔레스타인에 소환시키고자 본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술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체크포인트에서 검문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모습을 담음 쇼트를 마지막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풍경을 역사의 지질학적 장소로 다루는 듯합니다. 단순히 40년 전과 현재의 차이점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황량한 팔레스타인의 풍경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곳을 휩쓸고 갔을 게 분명한 제국주의 폭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건설될 수 있는 해방된 팔레스타인과 올리브 나무의 모습을, 또 파졸리니가 신약성서를 매게 삼아 물질화하고자 했던 신화적 가능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간의 쉼터는 어쩌면 망각의 위기에 놓인 ‘이미 일어난' 역사의 파편들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나야만' 하는 가능성의 파편들 또한 품어야 하는 게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이 검은 원을 보고 느꼈던 감정들을 서술한 것을 읽으며 고다르의 <여기 그리고 그밖에>에 쉬지 않고 등장하는 검은 화면을 떠올렸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PFLP) 관한 다큐멘터리 <적군/PFLP: 세계전쟁선언>를 연출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총자루를 손에 쥐기까지 했던 아다치 마사오는 고다르의 검은 화면(tableau noir)이 시사하는 것이 이미지의 수동적 침묵이 아닌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이미지를 제대로 보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 반드시 경유해야 할 ‘제로'의 상태라고 얘기합니다. 고다르가 1970년에 요르단에 거주하며 16mm 촬영한 해방 운동의 파편들을 프랑스로 가져와 아날로그 비디오 이미지들과 병치한 <여기 그리고 그밖에>야 말로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두 번째 데뷔작이 아닐까요? 여기서 고다르는 정치적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 가의 문제, 그리고 이미지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볼 것인 가의 문제와 더불어 영화의 형식 자체가 가진 정치적 가능성과 한계점을 탐구합니다.
16mm로 촬영된 분량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전우들이 살해된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라 결론지은 듯 해요 어쨌든 영화는 하나의 쇼트가 지나가면 그 자리를 다음 쇼트가 메우는 선형적 구조를 가졌음을 탄식하며, 그 구조가 우리가 역사를 서술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다르는 지적합니다. 마치 그 한계점을 타파하려는 듯 아날로그 비디오 편집 기술의 힘을 빌려 복수의 이미지를 중첩하는 데서, 우리는 고다르가 이미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인생)> 이전부터 비디오를 영화와 영화사, 그리고 20세기(그는 <영화사(들)> 연작에서 영화사=20세기사라고 못 박았습니다.)를 사유하고 비평하는 도구로 사용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여기 그리고 그밖에>를 재관람하며 저를 가장 감동하게 한 부분은 (세르주 다네가 지적했듯) 고다르가 본 영화가 던지는 영화 형식에서의 ‘그리고(et)'라는 문제와 이후에도 끈질기게 씨름하며 <언어와의 작별>에 이르러선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에요. 3D 상업영화의 필수 요소인 양안 시차 거리를 과감하게 버린 그가 택한 방법론은 왼눈과 오른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분리ᐧ해체하며 관객 본인이 스스로 그 파편들을 중첩하거나 몽타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몽타주는 고다르의 ‘멋진 근심'에서 관객이 정치적 주체로서 역사 ‘그리고' 이미지 사이를 어떻게 바라볼지의 과제로 해방된 듯합니다.
여러분 말대로 우리는 쇼아를 통해 이미지의 윤리를 배웠고, 또 그를 통해 세계의 윤리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옆에 ‘그리고'라는 단어를 절대 붙이지 않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유일무이하고 세계사의 그 어떤 학살과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졸렬한 식민지주의 논리에 정치적ᐧ윤리적 아이언 돔을 설치합니다. 미국에서는 이걸 ‘집단학살의 독점화'라고 표현하는데요. 홀로코스트 이후에 서정시란 불가능하다는 테제, 이제는 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19세기 남북전쟁을 치른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을 린칭한 뒤 나무에 매달아 교사형 시키는 일을 마치 서커스 구경하듯, 마을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크닉을 하며 ‘관람'하곤 했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도 그 린칭의 참상을 담은 사진이나 삽화가 그려진 엽서를 보내는 것이 백인들 사이에선 유행이었고요. 트위터에는 경찰의 과잉 진압에 희생되는 흑인들의 바디캠 이미지가 언제나 넘쳐납니다. 그래도 백인들은 서정시도 잘 써왔고, 1915년에는 <국가의 탄생>도 만들어냈죠. 물론 홀로코스에 희생된 이들과 유가족들도 같은 수모를 겪어야 한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홀로코스트가 갖는 특권적 위치를 이제는 박탈해야 할 때가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뿐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세계사의 유일한 쇼아도 아니며, 재현의 윤리와 이미지의 정치학 문제에 있어서 단일한 척도가 되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는 재현될 수 있는 가라는 질문, ‘그리고' 클로드 란츠만과 라즐로 네메스가 시온주의자라는 사실이 내포하는 참담한 정치적 함의. 이 둘을 함께 고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강에서 바다까지, 뉴욕에서 서울까지 이 편지가 잘 닿기를 바라며.
2024년 10월 28일
한겨울 드림
한겨울 드림
︎
두 번째 답신
겨울님에게,
한국에도 겨울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눈이 쌓인 풍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겠죠. 곧 내년이 찾아올 거란 사실이 조금은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겨울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공격은 레바논으로 확산되어 하마스의 레바논 내 동맹 세력인 헤즈볼라가 지배하는 지역을 “이스라엘 북부 지역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청소”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틀 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2017년 “예수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던 정부가 다시 돌아왔고, 그 소식을 들은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군 병사가 트럼프의 당선을 축하하며 기관총을 난사하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 정부는 석유 획득이라는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주요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이란의 영향력을 약화하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동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시각이 주요합니다. 미국-’이스라엘’ 연합이라는 어떤 상상의 공동체가 ‘국가적인 이익’을 위함이라는 핑계로 중동 국가를 재편하려는 민족주의/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오만함과, 중동 국가를 ‘타자화’하여 그들만의 정상성을 물리적으로 주입하려는 시도가 팔레스타인을 중동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근대에 생겨난 국민(민족, nation)은 자신의 뿌리를 고대적 기원에서 찾아 영속적인 국민(민족, nation)으로 상상하여, 그러한 영속적인 국민(민족, nation)을 위한 대규모의 희생(1, 2차 세계대전)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즉, 전쟁은 내셔널리즘의 강화를 위한 이분법적 사고를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우리’와는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시오니스트가 자신들의 뿌리를 “신이 유대인에게 세계에 이산(離散)해 마이너리티의 존재로서 여러 시련과 차별을 감수하며 유대교도로서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다 보면, 신이 메시아를 보내 우리를 팔레스타인으로 돌려보내 준다”라는 종교적인 믿음을 공동체 탄생을 위한 실제적인 무언가로 연금술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유대교 국가를 건설하고 본인들의 영속성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 것은, 오카 마리가 「가자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 시오니스트가 구축하길 원하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한 식민주의적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관해 영화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겨울님은 뉴욕반영화제의 마지막 상영작인 <Pasolini Pa* Palestine>에 등장하는 팔레스타인의 풍경에서 “제국주의 폭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건설될 수 있는 해방된 팔레스타인과 올리브 나무의 모습을, 또 파졸리니가 신약성서를 매게 삼아 물질화하고자 했던 신화적 가능성”을 말하며 “시간의 쉼터는 어쩌면 망각의 위기에 놓인 ‘이미 일어난' 역사의 파편들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나야만' 하는 가능성의 파편들 또한 품어야 하는 게 아닐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난 답신에서 시간의 쉼터는 영화에 드러나는 팔레스타인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공간, 흐르는 시간의 기억을 포착해 역사적 진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왔습니다. 마리 지르마누스 사바(Mary Jirmanus Saba)의 <Mahdi Amel in Gaza>(2024)가 가자 지구의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 폭격과 관련한 팔레스타인 언론 인터뷰 등을 몽타주 형식으로 배치하면서, 특히 가자 지구의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하면서 과거이자 현재인 가자 지구의 정치적 상황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제 지배의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렇지만 겨울님이 <Electrical Gaza>의 검은 원을 고다르의 검은 화면(tableau noir)과 연관지어 얘기해 주신 것처럼, 고다르가 말하는 영화에서 시간의 쉼터를 그리 단순하게 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가능성의 파편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까요? 고다르의 몽타주 이론을 설명해 주신 것처럼, “왼눈과 오른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분리ᐧ해체하며 관객 본인이 스스로 그 파편들을 중첩하거나 몽타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능해질까요? 오카 마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사적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땅의 역사적 기억을 물리적으로 말소함으로써 가자지구를 역사의 진공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표”1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관점으로, 역사적 기억의 삭제가 단순히 공간의 문제를 넘어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연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영화가 ‘이스라엘’이 구축한 ‘상상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누르 아부아라페(Noor Abuarafeh)는 <The Moon is a Sun Returning as a ghost>(2023)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의 미술작품을 찾습니다. 영화는 런던의 미술 창고의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종이로 감싸 보존된 미술 작품은 어떤 작품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보존 전의 index, 즉 색인으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스위스에서의 전시 이후 2년 뒤 미술관이 불에 타 모든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지만, 감독은 나레이션으로 사라진 작품이 그림이라는 물질로부터 해방되어 유령이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쇼트는 달의 표면 이미지로 넘어갑니다. 달이 지구와 3cm씩 멀어지는 것을 태양(불)에 타서 유령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면서요.
많은 영화 이론은 퍼스의 기호학 이론을 경유하여 영화의 이미지에 관해 말합니다. 매리 앤 도엔은 「The Emergence of Cinematic Time」에서 카메라는 그 상황을 찍어서 흔적을 남기기에, 영화는 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만들면서도, 쇼트와 쇼트를 연결해 연속성을 보장합니다. 즉, 영화는 필름이나 디지털의 형식으로 남아있는 매체적 특성 때문에 지나가 버린 현재, 즉 과거를 아카이빙할 수 있게 되며 그럼으로써 역사성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폴 윌먼은 「Indexicality, fantasy and the digital」에서 영화의 지표적 차원에 주목하고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한 미적⋅정치적 진보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전체적인 미학적 전략에서 지표성이 어떻게 동원되는지에 대한 방식과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윌먼은 우리가 역사라는 말로 납작하게 압축시켜버리곤 하는 흐름, 리듬 같은 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사유함이 필요하고, 이때 지표성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역학을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합니다.
<The Moon is a Sun Returning as a ghost>의 물질적 사라짐은 (유령이라는) 다른 형태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미술 창고에 쌓인 잊혀져 가는 작품들의 색인(index)은 잊혀져 가는 것에 관한 지표(index)입니다. 영화에 등장한 달 표면은 달의 순간을 포착한 지표(index) 입니다. 영화에서 말하는 작품과 달의 유령은 지표로써 그것의 물질-적임과 실존적 유대감을 쌓고 있기에 물리적인 제약을 넘어설 수도 있게 되며, 사라져-가는 팔레스타인의 작품이자 역사에도 개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독일군 장교 루돌프가 서 있는 1940년대의 아우슈비츠에 현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침입시켜 과거의 시간의 흐름에 균열을 냅니다. 영화는 대학살의 재현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아우슈비츠의 잔여가 현재에도 남아있음을 시사하지만, 시간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 루돌프가 살아가는 시간을 ‘과거’로 규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단절하게 됩니다.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앞에 ‘그리고(et)’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는 이상, 홀로코스트는 점점 ‘상상된 홀로코스트’화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이미지의 윤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많은 생각이 얽혀 있어 정리되지 않은 점에 양해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강에서 바다까지, 서울에서 뉴욕까지 이 편지가 잘 닿기를 바랍니다.
한국에도 겨울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눈이 쌓인 풍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겠죠. 곧 내년이 찾아올 거란 사실이 조금은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겨울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공격은 레바논으로 확산되어 하마스의 레바논 내 동맹 세력인 헤즈볼라가 지배하는 지역을 “이스라엘 북부 지역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 삶을 재건할 수 있도록 청소”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이틀 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2017년 “예수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던 정부가 다시 돌아왔고, 그 소식을 들은 가자 지구의 ‘이스라엘’군 병사가 트럼프의 당선을 축하하며 기관총을 난사하는 영상을 올렸습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 정부는 석유 획득이라는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주요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이란의 영향력을 약화하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동 질서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시각이 주요합니다. 미국-’이스라엘’ 연합이라는 어떤 상상의 공동체가 ‘국가적인 이익’을 위함이라는 핑계로 중동 국가를 재편하려는 민족주의/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오만함과, 중동 국가를 ‘타자화’하여 그들만의 정상성을 물리적으로 주입하려는 시도가 팔레스타인을 중동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에서 근대에 생겨난 국민(민족, nation)은 자신의 뿌리를 고대적 기원에서 찾아 영속적인 국민(민족, nation)으로 상상하여, 그러한 영속적인 국민(민족, nation)을 위한 대규모의 희생(1, 2차 세계대전)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즉, 전쟁은 내셔널리즘의 강화를 위한 이분법적 사고를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우리’와는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시오니스트가 자신들의 뿌리를 “신이 유대인에게 세계에 이산(離散)해 마이너리티의 존재로서 여러 시련과 차별을 감수하며 유대교도로서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다 보면, 신이 메시아를 보내 우리를 팔레스타인으로 돌려보내 준다”라는 종교적인 믿음을 공동체 탄생을 위한 실제적인 무언가로 연금술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유대교 국가를 건설하고 본인들의 영속성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 것은, 오카 마리가 「가자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 시오니스트가 구축하길 원하는 ‘상상의 공동체’를 위한 식민주의적 사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관해 영화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겨울님은 뉴욕반영화제의 마지막 상영작인 <Pasolini Pa* Palestine>에 등장하는 팔레스타인의 풍경에서 “제국주의 폭력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아무것도 없는' 대지 위에 건설될 수 있는 해방된 팔레스타인과 올리브 나무의 모습을, 또 파졸리니가 신약성서를 매게 삼아 물질화하고자 했던 신화적 가능성”을 말하며 “시간의 쉼터는 어쩌면 망각의 위기에 놓인 ‘이미 일어난' 역사의 파편들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나야만' 하는 가능성의 파편들 또한 품어야 하는 게 아닐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난 답신에서 시간의 쉼터는 영화에 드러나는 팔레스타인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기억의 공간, 흐르는 시간의 기억을 포착해 역사적 진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단순히 과거를 되짚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왔습니다. 마리 지르마누스 사바(Mary Jirmanus Saba)의 <Mahdi Amel in Gaza>(2024)가 가자 지구의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 폭격과 관련한 팔레스타인 언론 인터뷰 등을 몽타주 형식으로 배치하면서, 특히 가자 지구의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비선형적으로 배치하면서 과거이자 현재인 가자 지구의 정치적 상황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제 지배의 역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렇지만 겨울님이 <Electrical Gaza>의 검은 원을 고다르의 검은 화면(tableau noir)과 연관지어 얘기해 주신 것처럼, 고다르가 말하는 영화에서 시간의 쉼터를 그리 단순하게 명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가능성의 파편을 어떻게 품을 수 있을까요? 고다르의 몽타주 이론을 설명해 주신 것처럼, “왼눈과 오른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분리ᐧ해체하며 관객 본인이 스스로 그 파편들을 중첩하거나 몽타주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능해질까요? 오카 마리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사적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땅의 역사적 기억을 물리적으로 말소함으로써 가자지구를 역사의 진공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표”1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관점으로, 역사적 기억의 삭제가 단순히 공간의 문제를 넘어 정체성 형성과 사회적 연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조심스럽지만 영화가 ‘이스라엘’이 구축한 ‘상상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누르 아부아라페(Noor Abuarafeh)는 <The Moon is a Sun Returning as a ghost>(2023)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의 미술작품을 찾습니다. 영화는 런던의 미술 창고의 풍경으로 시작합니다. 종이로 감싸 보존된 미술 작품은 어떤 작품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보존 전의 index, 즉 색인으로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2005년 스위스에서의 전시 이후 2년 뒤 미술관이 불에 타 모든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지만, 감독은 나레이션으로 사라진 작품이 그림이라는 물질로부터 해방되어 유령이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쇼트는 달의 표면 이미지로 넘어갑니다. 달이 지구와 3cm씩 멀어지는 것을 태양(불)에 타서 유령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면서요.
많은 영화 이론은 퍼스의 기호학 이론을 경유하여 영화의 이미지에 관해 말합니다. 매리 앤 도엔은 「The Emergence of Cinematic Time」에서 카메라는 그 상황을 찍어서 흔적을 남기기에, 영화는 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만들면서도, 쇼트와 쇼트를 연결해 연속성을 보장합니다. 즉, 영화는 필름이나 디지털의 형식으로 남아있는 매체적 특성 때문에 지나가 버린 현재, 즉 과거를 아카이빙할 수 있게 되며 그럼으로써 역사성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폴 윌먼은 「Indexicality, fantasy and the digital」에서 영화의 지표적 차원에 주목하고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한 미적⋅정치적 진보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전체적인 미학적 전략에서 지표성이 어떻게 동원되는지에 대한 방식과 목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윌먼은 우리가 역사라는 말로 납작하게 압축시켜버리곤 하는 흐름, 리듬 같은 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사유함이 필요하고, 이때 지표성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역학을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설명합니다.
<The Moon is a Sun Returning as a ghost>의 물질적 사라짐은 (유령이라는) 다른 형태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미술 창고에 쌓인 잊혀져 가는 작품들의 색인(index)은 잊혀져 가는 것에 관한 지표(index)입니다. 영화에 등장한 달 표면은 달의 순간을 포착한 지표(index) 입니다. 영화에서 말하는 작품과 달의 유령은 지표로써 그것의 물질-적임과 실존적 유대감을 쌓고 있기에 물리적인 제약을 넘어설 수도 있게 되며, 사라져-가는 팔레스타인의 작품이자 역사에도 개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독일군 장교 루돌프가 서 있는 1940년대의 아우슈비츠에 현대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침입시켜 과거의 시간의 흐름에 균열을 냅니다. 영화는 대학살의 재현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아우슈비츠의 잔여가 현재에도 남아있음을 시사하지만, 시간성에 균열을 내기 위해 루돌프가 살아가는 시간을 ‘과거’로 규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단절하게 됩니다.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앞에 ‘그리고(et)’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는 이상, 홀로코스트는 점점 ‘상상된 홀로코스트’화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이미지의 윤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많은 생각이 얽혀 있어 정리되지 않은 점에 양해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이겠습니다.
강에서 바다까지, 서울에서 뉴욕까지 이 편지가 잘 닿기를 바랍니다.
2024년 11월 15일
난둘 드림
난둘 드림
1) 오카 마리, 『가자란 무엇인가』, 두번째테제, 김상운 번역. 2024, 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