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
살아있는 영화에 관하여
난둘
영화관이 더는 집합 장소가 되지 않는 시대에 영화관과 영화를 고찰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질문은 코로나 19 팬데믹의 영향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결국 나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기 시작했던 시기로 되돌아가 질문의 의미를 톺아보며 그에 관한 답을 찾게 되었다. 10여년 전만 해도 영화관에 가면 예매 창구 쪽 스크린에 뜬 영화 제목 옆에 [디지털]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곤 했다. 오늘날 어떤 영화관에서도 [디지털]이라는 말을 영화 제목 옆에 달아놓지 않는다. 영화를 디지털 형태로 상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만들어진 영화를 영화관 스크린에서만 감상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영화관에 가는 대신 OTT 서비스를 이용해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 필름을 영화관에서 ‘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화의 죽음’을 선언했던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이론의 희미한 저항이 되었다. 필름으로 영화가 영사되던 시절부터 [디지털]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OTT 플랫폼 콘텐츠가 범람하는 현재까지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은 많다. 그들 중 많은 수가 변화하는 시대에 발 맞추어 다양한 플랫폼에서의 개봉을 도전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죽음’이라는 선언은 유효하다. 물론 영화는 ‘물리적으로’ 죽지 않았다. 계속해서 기획되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창조되는 영화 속 현실과 영화 바깥 속 현실은 여전히 상호작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물리적 생존이 선언자들이 원하는 ‘살아있는 영화’에 절대적으로 수렴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살아있어야 하는가?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를 감상한다. 나는 이 감상을 영화가 살아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생각한다. 영화관에 모여서 영화를 감상하던, 혼자 OTT로 영화를 감상하던,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한다. 이 감상의 연장이 영화 그 자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건 아닐까. 지지부진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 살아있는 영화란, 그것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이처럼 관객과 영화가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는 그 장르와는 상관없이 현실의 어떠한 지점과 맞닿아있어야 한다. 영화는 현실을 드러내고 지적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야 한다. 물론 현실에 천착하는 리얼리즘적 태도만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영화 자체의 방식’으로 현실과 맞닿아야 한다.
네오-리얼리즘 시기의 영화가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 사조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할 능력도 없을 뿐더러,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와 맞닿은 현실을 부동의 단면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내세우는 특유의 철학과 스타일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한 곳에서만 영화를 감상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는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된 오늘날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 유통의 변화에 적응하는 감독이 눈에 띄는 것에 비해, ‘영화 자체의 방식’에 변화를 꾀하는 감독은 많지 않아 보인다.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은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에서 말하는 ‘영화 자체의 방식’을 기존의 평론가나 이론가가 말해 왔던 영화의 시네마틱한 요소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는 이 글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이 글의 목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영화가 자체의 동력과 빛남으로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영화의 죽음’이라는 선언의 그림자를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드러내는 ‘죽음’ 혹은 ‘죽음과 비견되는 공포’로 영화의 죽음이라는 선언을 전복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으로부터 이 글은 출발한다. 그래서 나는 사뭇 단순하게도 비-물리적 공포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방식으로 구현해 낸 구로시와 기요시의 작품들에 집중해 보았다. <크리피 :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2016)과 <산책하는 침략자>(2018)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기존의 필모그래피에서 드러낸 인간 실존에 관한 의식과 다른 결을 보여준다. 특히 <산책하는 침략자>는 그의 작품 중 이질적인 영화로 평가받는 경향이 있는데, 호러 영화의 거장인 기요시가 SF영화를 만들어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의 결말이 그의 작품 중 가장 명백한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의 대표작인 <큐어>(1997)의 엔딩과 비교해보자. 구로사와 기요시가 만든 모든 작품을 그의 대표작인 <큐어>와 비교하고 싶은 것은, 그가 <큐어>이후 만들어낸 작품 대부분이 <큐어>와 같은 공포라는 장르를 취해서라기보다는, <큐어>에서 보여준 인간 실존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이 그의 일련의 작품에서 차이를 보이며 계속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큐어>의 엔딩도 얼핏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데, 주인공인 타카베(야쿠쇼 코지)가 웃으며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스트 쇼트로 찍혀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타카베로부터 눈을 돌려보면, 타카베에게 음식을 서빙했던 종업원이 칼을 들고 웃으며 어딘가로 돌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최면으로 사람의 내면 속 악을 꺼내 다른 이를 죽이도록 하는 대리-연쇄 살인마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가 세상에서 소멸했음에도, <큐어> 속 세계에서 마미야의 행위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타카베의 마음 속 깊숙이 숨겨둔 정신병 덕분에 집안일을 하지 못하는 아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일깨워준 마미야 때문인지, 혹은 마미야의 집을 방문한 타카베가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조작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인지 원인을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악의가 인간을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믿음이 <큐어>의 세계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바른 정신이란 허상일 뿐이라는 <큐어>의 믿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즉, <큐어>의 마지막 씬을 통해 감독은 규율화된 인간 사회에 대한 불신과 인간의 실재가 악이라는 단호한 신뢰를 보여준다.
인간의 원죄에 대한 냉담한 시선은 <큐어> 이후 <회로>와 <절규> 같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 영화들을 끌고 가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도쿄 소나타>(2008)부터 그는 변화의 실마리를 영화에 풀어놓았다. 단순히 ‘가족 영화’로 표상되는 장르의 변화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세상을 20세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의문을 표한 것이다. 그는 <회로>에서 누구든 상관없이 컴퓨터에 접속한다면 악령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내러티브를 보여주면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0과 1로 이루어진 진공의 세계를 미래 없는 세계로 바라보며 21세기에 대한 절망을 드러냈다.
그런 그가 <도쿄 소나타> 인터뷰에서 “왜 21세기는 이전 세기에 우리가 기대했던 미래의 비전과 이토록 다른 것일까. 이런 시대에 대한 책임은 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도쿄 소나타>는 이런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창조되었고, 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라는 의식을 드러낸 것은 큰 변화로 보인다. 그렇지만 <도쿄 소나타>는 여전히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그들의 원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놓지 않는다. “외부 세계의 움직임에 의해 가족은 끊임없이 좌지우지될 거다. 영화 속 가족은 직접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일본은 직접적으로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내부 구성원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내부의 모든 것을 바깥 세계의 변화와 직시하도록 하는 게 더 나은 일인가. 많은 일본인들은 일상적으로 이런 선택과 마주한다. 21세기를 혼돈 속에서 살아간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다.”
씨네 21에 기고된 김도훈 평론가의 <도쿄 소나타> 분석처럼 일본인인데도 뜬금없이 미국 군대로 입대한 큰아들을 마지막 장면에서 지워버리고 죽은 아버지를 살려놓아 막내 아들의 공연장으로 데려다 놓는 그의 선택은 혼돈을 통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크리피 :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에서 의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크리피>는 분명 모든 디테일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큐어>를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큐어>와 비슷하게 어딘가 어긋나 보이는 형사와 그의 아내를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진행되기 때문일테다.
범죄심리학을 전공한 형사였던 다카쿠라(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영화 초반부터 사이코패스를 설득하는데 실패한다. 그렇게 이론에 대한 신뢰를 현장에서 배신당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론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로 부임하지만 현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히노 시(일본 도쿄에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다)의 미해결 사건 중 일가족이 사라지고 딸이 홀로 남은 사건에 주목한다. 왠지 이사를 간 동네에서 만난 니시노(가가와 데루유키)가 그 사건의 용의자인 것만 같다는 다카쿠라의 직감은 맞아떨어진다. 니시노는 약물로 사람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다. <큐어>에서 마미야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것과는 달리, 니시노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마치 지하실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유인한다. 영화는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입구같아 보이는 집의 한 켠은 그저 블랙홀 같은 검정 그림자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공간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인서트 컷이 부재한 이유는, 그 공간이 집과 연결된 공간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즉, <큐어>와 달리 <크리피>의 범죄 공간은 영화의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니시노가 범죄를 저지르는 목적은 상당히 명확하다. 가족을 와해시켜 그들의 돈을 갈취하는 것. 그러니까 친밀해 보이는 관계의 허점을 비집고 들어가 갈라놓는 상당히 독특한 범죄의 이유가 단지 돈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큐어>에서 마미야가 인간의 본성을 꾀어내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것과는 다르다. 물론 마미야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범죄를 저질렀다 말한 적 없다. 하지만 타인과 만나 “넌 누구지?”라고 계속해서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을 가리고 사는 타인을 깨워내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반면에 니시노가 빼앗은 돈은 어떤 대단한 것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그에게 돈은 그저 삶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손으로 죄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니시노를 대신해 범죄를 행위적으로 구현하는 사람은 미오(후지노 료코)로 니시노의 수법에 속아넘어간 가족의 일원이다. 그는 죽은 아버지를 진공 압축팩으로 포장하고 어머니에게 약물을 맞힌다. 니시노는 약물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총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데, 그것조차 타인의 손을 이용하고자 한다.
<크리피>가 선택하는 죽음은 말 그대로 물리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을 이끄는 사람은 초월적인 것으로 다가가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범죄의 공간은 현실과 벗어나 보이지만 오히려 현실과 맞붙는다. <크리피>는 특유의 무력함으로 우리가 체험하며 몸으로 체화하는 현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현실 세계를 유랑하는 기억 상실자 마미야를 결과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 세계를 부정하는 <큐어>와는 다른 방식이다.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인간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온 세 명의 외계인들은 <큐어>의 마미야와 비슷하게 많은 곳을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외계인들은 인간의 언어 개념을 빼앗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는 기억 상실증에 걸렸지만 기본적인 언어 개념을 파악하고 있을 마미야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것과는 다르다. 결국 외계인들은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신체적인 체벌을 가하는 폭력적인 방식을 택한다. 아내를 따라다니는 신지(마쓰다 류헤이)를 제외하고 아마노(다카스기 마히로)와 아키라(쓰네마쓰 유리)가 특히 그러하다.
살짝 글의 흐름을 벗어나는 것 같지만, 여기에서 의문을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과연 외계인들이 인간의 언어 개념을 완벽하게 빼앗는 것이 가능한가? 언어와 감정은 항상 미묘하게 차이가 있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데 실패하지 않는가. 언제나 비껴가고 미끄러지는 그 느낌을 외계인들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인가? 결국 외계인들의 침공은 여기서부터 실패다. 그러나 우리는 외계인들의 실패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실패는 비-실패다.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외계인) 신지는 지구를 떠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 받는 아내를 끝까지 보살핀다. 이를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습득한 외계인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속 인물들은 상대방의 말을 ‘너무도’ 잘 듣는다. 처음에 기요시는 그러한 인간의 무방비함을 경계했던 것 같다. <큐어>의 마미야와 <크리피>의 니시노는 이러한 경계를 드러내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아니 <산책하는 침략자> 때부터 기요시는 인간이 무방비해야 인간임을, 타인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믿게 된 듯 하다. 그렇기에 신지는 아내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혹시 이러한 비-실패가 영화의 세계가 영화에 머무르면서도 삶에 스며들어오는 방법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흐름, 변화하는 ‘영화 자체의 방식’이 ‘영화의 죽음’이라는 부동한 무언가에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구로사와 기요시는 <스파이의 아내>로 조금 더 현실에 천착하고자 한다. 물론 공동체에 관한 믿음은 여전히 부재하다. 그렇지만 <스파이의 아내>에는 옳고 그른 것 사이의 딜레마,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를 넘나드는 일본의 역사에 관한 인식, 죽음으로의 열망과 살아있음의 감각 사이의 갈등 같은 인간 특유의 변증법적 인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토록 90년대부터 영화를 만들어 온 구로사와 기요시의 변화를 통해 아직 영화는 살아있음을, 고로 ‘영화의 죽음’은 ‘영화의 생’이 있기 때문에 말해질 수 있는 것임을,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는 앞으로도 영화에서 계속 반복될 것임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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