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름 감독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2020)
긴 복도 (2021)



다(多)분법의 지구_난둘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이 주목하는 것은 접근 불가능했던 주한미군-공동체다. 그곳은 역사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장소지만 좌표값으로는 파악이 가능한 가상의 공간에서 증명되는 장소이다. 어떤 곳보다 '중심'적인 사고로 '개념화'되어지나 '비가시적' 장소는 '가상' 공간에서 '가시화'된다. 가상과 현실을 접목한 가상-현실 세계에서 무엇보다도 현실에 맞닿은 대문자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현실에서는 비가시화된 채로 가상-현실 세계에서 가시화된다.

수많은 건물과 사람이 존재하지만, 발길을 닿을 수 없는 주한미군 기지는 언젠가 캠프 롱 기지처럼 폐허가 될 것이다. 캠프 롱에 남아있는 건물 속은 텅 비었고, <긴 복도>는 그 건물을 탐사한다. 그곳에서 접하는 공기는 매우 서늘하다고 느껴진다.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것이 나(관객)에게로 감각된다. 비접촉의 접촉. 접촉되는 캠프 롱 기지는 텅 비었지만, ‘그 지구’라고 불리우는 가상-현실 세계에 남아 있는 ATM 기기는 몇십 년을 넘나들며 그 지구에 존재해 왔다. 그렇지만 현실 세계인 ‘이 지구’에 그 기기는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 지구와 그 지구에 모두 존재(했)하는 ATM 기기는 ‘해피 타임’을 증명할 수 있을 무엇이다.

이상하다. 앞에서 등장하는 현실‘들’은 모두 현실이지만 각기 다른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가상-현실이 오히려 더욱 현실에 가까운 건 아닐까? <긴 복도>가 말하듯 이 지구에 있는 것은 그 지구에 옮겨 간다. 그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전쟁에 열광하는 신의 눈으로 (무엇을? 무엇이든!) 바라보겠다고 선포하며 시작한 영화가 역설적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전도되듯이,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가상-현실 세계를 현실보다 현실적인 무엇으로 만든다. <긴 복도>는 애초에 이 지구와 그 지구로 현실‘들’을 정의한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현실은 이미 구분되지 않는 것 아닐까?

포켓몬고 녹화 영상, 위성 지도, 3D 모델링, 뉴스 푸티지 등 가공된 것을 편집으로 한 번 더 가공해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가공된 영화. 폐허가 된 기지를 탐사하며 그 자체의 공기를 접촉하게 만들고 그 접촉을 위성을 통한 또 다른 지구로 끌고 와 증명하기 힘들어 공백처럼 보였을 역사를 가시화하는 영화. 미군 기지의 모습이 1970~1980년대 미국을 재현한 텔레비전 쇼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둔 것처럼 보인다는 내레이션. 이 지구와 그 지구로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지만 결국 이 지구와 그 지구는 서로의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전제한 채로 전개되는 나레이션.

역학 조사라는 일명으로 타인의 카드 결제 내용, 이동 동선을 알게 되는 것. 카카오톡의 먹통으로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겪게 되는 것. 위성에 자신의 위치를 공유해 모르는 장소를 찾아가는 것. 우리는 이미 현실-보다-현실 같은-가상 세계에 입장해 있다. 더는 우리의 현실 세계를 피부에 맞닿은 무언가라 불러서는 안 된다. 미군 기지라는 무엇보다도 실재하는 현실을 비가시화되었다는 이유로 접촉할 수 없는 무엇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포켓몬고 속 미군 기지 시설물에 ‘우리’는 접촉할 수 없지만, ‘우리’는 휴대폰의 액정에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을 통해 이 지구의 시설을 감각하고 그 지구의 ATM 기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접촉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WE SEE YOU_A

이제는 사라진 주한미군의 기지 캠프 롱Camp Long으로 카메라가 부드럽게 들어가 ‘긴 복도’를 살핀다. 사라진 공간으로의 진입은 일인칭 슈팅 게임을 상기시키고, 언제 어디서 적군이 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으로 <긴 복도>가 시작된다. 어둠과 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카메라는 핏자국으로 덧쓰여진 “We See You”라는 글자를 맞닥뜨리자 크게 놀라 뒷걸음질 치며 황급히 긴 복도를 빠져나온다. 타국에 쓰인 이국의 언어와 이국적 장소에서 우리는 너를 본다, 너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했던 ‘우리’(미국을 제외한, 타자)는 너라고 불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을 ‘우리’(미국)를 본다고, 볼 것이라고 정여름의 영화는 소구address하고 있다.

<긴 복도>와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은 제국과 식민의 기억이 아메리카합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체제 하에 은닉되었던 제국의 흔적을 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준 세피아톤의 사진 한 장, 1930년대의 선전 영화, 증강 현실 비디오 게임, 공공 CCTV, 다국적 대기업의 위성 지도와 3D 모델링이라는 역사의 조각을 한데 모아 다시 편집하는 영화는 물리적 필름을 가위로 싹둑 잘라 이어 붙인 영화의 모양새와 유사하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보여주기 위해 두 영화가 선택한 이러한 방식은 인간의 눈으로는 지각할 수 없던 것을 넘어 가상의 이미지와 비물질적 응시를 통해 세계의 지도를 다시 구축한다. 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카메라 렌즈와 동기화되고, 일상적 경험으로 조직되는 데스크톱 레코딩과 연결되는 카메라와 그 바깥 세계 사이의 매끈함은 봄과 보여짐의 관계를 성립시키지 못한다. 보는 것이 권력이고, 응시로부터 숨을 수 있는 것 역시 권력이라면, 뻔히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일본이 남긴 땅을 땅따먹기하듯 차지한 거대한 하나의 미국이라는 은폐된 세계를 보기 위해 영화는 보여짐의 대상이었던 피식민자의 시선이 아닌 때 묻지 않은 역사를 가진 전능한 기계적 눈으로 보는 방식을 우회하여 절대적 신, 가상의 신인 그라이아이, 이시도라, 페도라의 눈이 되는 것이다.

소위 ‘데스크톱 시네마desktop cinema’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영화적 방식은 이미 존재하는 도큐먼트를 ‘파운드Found’하여 역사-서술을 시도하는 아카이브적 영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화 실천을 캐서린 러셀은 아키비올로지라는 개념으로 서술하며, 이것은 역사가 어떻게 재현되고, 어떻게 재현이 거짓이미지가 아닌 사실 자체로서의 역사적이고 인류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아카이브 자료를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층화와 복원의 과정은 에세이의 범주이며, 아키비올로지의 에세이적 가치는 영화제작자가 이미지가 그들 자신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중요한 인식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데리다 역시 아카이브의 사용에 관해 설명하면서 아카이브는 원본의 도큐먼트를 파편화, 파괴시킴으로써 아카이브 자체에 역행하는 것이며, 이러한 영화에서의 죽음충동은 반복적으로 복원되는 역사적 쾌락과 경험의 폐허 위에서 항상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캐서린 러셀, Archiveology: Walter Benjamin and Archival Film Practices. 이를테면, 정여름 영화에서의 미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미군 기지의 유사적인 훌륭함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영상과 식민지인을 전장으로 내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선전영화의 재사용과 전용은 아카이브 자체를 좌초하게 만든다. 즉, 기존의 아카이브가 사건의 증거라고 여겨졌다면, 정여름의 영화에서의 아카이브는 아카이브 자체의 실패에 관해, 시간차가 만들어내는 오류를 문제 삼는다. “아키비올로지Archiveology”에서 “-ology”의 그리스 어원이 특정 방식으로 누군가를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결국 이 봄과 보여짐의 전복으로 발생하는 힘의 전치에서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시작해 AI라는 기계의 목소리로 옮겨진 간극에서 영화가 말 걸고 있는 우리와 너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