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
Raw, Grave, 2016
쥘리아 뒤쿠르노
우리 속의 사자
- 서너시
<로우>는 채식주의자인 소녀가 식인에 빠져들게 된다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악명 높은 영화다. 이런 식으로 요약된 내용을 보게 되면 육식을 향한 억눌린 욕망을 분출하는 주인공을 통해 채식주의의 위선이나 모순을 고발하는 영화로 생각하기 쉽다. <로우>를 반채식주의 메시지를 포함하는 영화로 독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장르적으로 볼 때 뱀파이어물에 가깝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옥자>(2017)의 반대 버전, 육식주의 영화라기보다는 <트와일라잇>(2008) 쪽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저스틴 가족은 '뱀파이어 패밀리'가 아니다. 저스틴(과 그의 가족)은 야만의 상태로서의 짐승, 그중에서도 사자다. 영화상에서 저스틴이 사자라는 동물로 특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외양과 행동은 사자와 매우 유사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학교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저스틴의 얼굴에 햇빛이 비칠 때 특히 비슷하다.)이 사자와 비슷하고, 사자가 자신의 털을 그루밍하듯 머리카락을 입에 넣고 있는가 하면, 고양잇과 동물들이 헤어볼을 토해내는 것처럼 머리카락 뭉치들을 토해내기도 한다. 룸메이트와 '교미'를 하는 도중 목덜미를 물고 싶다거나 인간에게 식욕을 느끼는 제어 불가능한 욕구는 이 어린 사자-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다.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가는 뱀파이어들에게 흡혈 욕구가 저주인 것처럼 저스틴 가족에게도 식인 욕구는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저스틴의 어머니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엄격한 채식주의를 요구함으로써 집안 내력으로 이어지는 '저주'를 억누르려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저스틴의 식인 행위가 가족사 혹은 가족의 숨겨진 비밀로 확장되는 것은 끝에 가서다. 저스틴 가족의 '저주'는 결말에서야 드러난다. 저주의 기원은 <로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로우>의 서사를 끌어가는 것은 식인 행위를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저스틴과 저스틴의 언니 알렉스의 아슬아슬한 관계다.
언니 알렉스는 잘려 나간 자신의 손가락을 저스틴이 먹어 치우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동생이 인간에게 식욕을 느낀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게 된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저스틴의 식인 욕구가 다른 가족 일원에게 공유되는 유전적인 것인지 아니면 '돌연변이 괴물'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알렉스의 역할과 정체는 모호해진다. 그녀는 먹이를 거부하는 육식 동물에게 유전적 특질에 따른 먹이를 공급하고 그것을 먹게끔 유도하는 수의사인가, 아니면 어린 짐승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성체인가? 비밀을 지켜준(결말에서 밝혀지는 바에 의하면 사실은 공유하고 있는) 알렉스는 저스틴을 자신이 돌보는 동물인 것처럼 대하지만 정작 자신이 저스틴의 룸메이트를 죽이고 그를 먹음으로써 감옥에 갇힌다. 이 장면에서 식인 행위를 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알렉스를 저스틴이 씻겨주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역전된다. 알렉스가 저스틴은 하지 않은 식인을 한 순간, 수의사로서의 지위는 박탈되고 우리에 갇힌 짐승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저스틴과 알렉스의 식인 행위를 카니발리즘으로 볼 수 있을까? 그것을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는 <로우>에서의 식인이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다른 동물을 사냥하고 그 고기를 취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저스틴이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권리가 있다고 말할 때, <로우>에서는 동물의 권리 향상 혹은 인정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와 지위를 박탈함으로써 동물과 인간의 동등성을 이뤄낸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고기와 돼지고기의 구분이 어려워지는 ‘고기’의 수준에서다.1) 저스틴은 운동장에서 모여 있는 인간 무리를 보며 닭장 속 닭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을 하고, 돼지나 인간이나 다를게 없다는 말을 들으며 돼지고기를 격렬하게 씹어댄다. 동물처럼 네발로 기어서 가는 신입생들의 모습은 명확하게 동물로서의 인간, 야생의 짐승이 아닌 가축화된 동물들의 모습이다. 운 나쁘게도 가축들의 우리 안에 사자 두 마리가 섞여 들어오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포획당한' 알렉스를 면회 간 장면에서, 거울에 비친 알렉스의 모습은 어머니의 상과 겹쳐진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저스틴 가족의 비밀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전부터 아버지 입가에 있는 흉터로 암시되었던 그 비밀은 어머니 역시 사람들 틈에 섞여 살고 있는 육식 짐승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살점을 물어뜯으면서 그 본능을 해소하고 억누르며 채식 동물로 살아간다. 알렉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저스틴도 인간들 속에 섞여들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저스틴 가족에게 '수의사'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된다.
1) 이렇게 본다면 <로우>를 육식주의 영화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카니발리즘적인 것이다.
껍질 벗겨내기, 뺏기, 적응하기,
그 이후에 남는 것?
- 난둘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에 의문을 가져본 적 있는가? 특정한 행위에는 사회적 동물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가치가 쌓인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동물들의 행태 또한 그러하다. 인간은 인간을 먹지 않는다, 동물은 같은 종족을 사냥하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해야 한다, 동물은 인간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모두 인간이 정한 것이다.
<로우>는 폭력적 위계질서로 지배된,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체계를 내세우며 행위에 쌓인 가치들을 살살 벗겨낸다. <로우>의 체계(이자 질서)는 끔찍하다. 수의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수의학과 바깥의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로서 인정받지 않는다. 수의학과 내의 질서를 따라야만 하는 개체로 변한다. 정상이지 않은 것들이 정상으로 취급되는 체계의 대표 관문은 토끼 콩팥 먹기다. 저스틴은 채식주의자로서 그것을 거부하지만, 그 체계에서 쫓겨나고 싶지는 않다. 결국 콩팥을 먹게 된 저스틴은 밤새 피부 알레르기에 시달리며 몸을 긁어댄다.
사정없이 몸을 긁어대는 저스틴의 행위는 혹시라도 그의 피부가 벗겨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관객의 조바심과 합쳐져 공포를 조장한다. 공포는 껍질 벗겨내기의 출발이다. 다만 이 공포는 이상한 체계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저스틴이 그 체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이탈로 인해 극대화되는 무언가다. 저스틴은 콩팥을 먹은 후 육식에의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그 충동은 냉장고의 생 닭고기를 뜯어먹는다거나, 카페테리아의 고기를 훔치는 식의 과격한 행위로 표현된다. 이러한 과격함은 수의학과의 체계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누구도 저스틴의 과격함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곳의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시험지를 컨닝당한 저스틴에게 자네같은 학생이 오히려 앞길 창창한 미래의 수의사를 망친다는 식으로 말한 교수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 특출나지 않고 질서를 열심히 따르는 것이다.
저스틴은 단백질을 섭취하려는 듯 자신의 머리칼을 씹어대며 교수에게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후 저스틴은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끝없이 나오는 머리칼을 토해 낸다. 저스틴은 체계에 대꾸함으로써 체계를 받아들였지만, 그 체계를 저항하며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어쨌든 저스틴은 새로운 삶에 나름대로 적응하는 듯 보인다. 물론 그 방식이 체계에게 환영받는 방식은 아닌 듯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다 저스틴은 사고로 언니 알렉스의 손가락을 자르고 충동적으로 그것을 맛본다. 친언니의 손가락을 씹어먹는 모습은 과격함을 넘어선 구역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가족의 참사인 카니발리즘의 시작은 알렉스에게 오히려 카니발이다. 알렉스야말로 카니발리즘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존재다. 알렉스는 저스틴을 데리고 차도로 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낸다. 그리고 나서 죽은 사람을 뜯어먹는다. 저스틴은 알렉스를 말린다. 알렉스는 말한다. 이렇게 해야 살아갈 수 있다. 이제 판도가 바뀐다. 껍질 벗겨내기를 해야만 체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둘은 더는 충돌하지 않고 상호 보완한다. 저스틴은 이를 거부하려고 하지만 자신에게 키스한 남성의 입술을 물어뜯는다. 그리고 그 입술의 맛을 음미한다.
저스틴은 종종 런닝머신에서 달리는 실험용 말에 관한 꿈을 꾼다. 실험용 말은 런닝머신을 멈출 수 없다. 달리고 싶지 않아도 살아남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한다. 저스틴은 체계 내부의 사람을 해치지 않기 위해 체계 외부의 사람을 뜯어먹어야 한다. 알렉스도 그렇게 버텨 왔다. 하지만 알렉스는 저스틴을 위해 런닝머신을 멈춰 주지 않는다. 오히려 저스틴이 술에 취한 틈을 타 남들 앞에서 시체를 여기저기 핥게 해 런닝머신을 고장내 버린다. 그리고 나서 알렉스는 저스틴이 좋아하는 아드리앙의 허벅다리를 뜯어 먹어버림으로써, 자신이 탄 런닝 머신에서 스스로 튕겨져 나간다. 알렉스는 걸을 수 없게 됐고, 저스틴은 걸을 수밖에 없게 됐다.
저스틴은 카니발리즘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저스틴에게 어떻게든 길을 찾을 것이라 말했지만, 저스틴의 길은 영화의 시작에서 알려주듯 알렉스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이다. 저스틴이 체계에 순응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어 안전한 삶을 사는 것은 <로우>에서 불가능해 보인다. 이제 껍질 벗겨내기 같은 공포는 끝났다. 저스틴의 카니발리즘은 더는 우리에게 공포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한 체계는 알렉스처럼 교도소에 갇혀버리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이것이 <로우>에서 가장 큰 공포다.
억압과 위반 사이 : 우유 표면의 얇은 막에서
- A
<로우>는 공포영화라는 컨벤션 장르 안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함께 수반되는 불안과 신경증 그리고 신체의 변화에 관한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동시에 <로우>는 공포영화의 관습에서 여성이 남자-괴물의 반대항으로서 희생자로 등장하곤 했던 여자-괴물female monster을 젠더의 역할이 여성 괴물성의 핵심으로 작용하는 여성-괴물monstrous-feminine로 비틀어 나간다. 영화는 와이드한 프레임에 집요하게 놓이는 저스틴을 팔로우하면서도, 외부 상황에 끊임없이 포섭되는 저스틴과 그 내부에서 진동하는 갈등에 포커스를 맞춘다. 저스틴은 부모로부터의 분리와 새로운 집단으로의 귀속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식인으로 동인되는 자신의 신체적 변화와 함께 어느 곳에 머무를지, 아니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을지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며 억압과 위반 사이를 오간다.
<로우>에서 억압과 위반, 통제와 자유는 우유 표면의 얇은 막과도 같다. 집단적인 형상으로 제시되는 신입생 신고식에서 신입생들은 종렬로 세워지고, 수직적으로 하강되며, 짐승처럼 무릎 꿇고 바닥을 긴다. 폭력적인 통제가 끝나면 비로소 자유가 주어지고, 이는 식인의 피가 흐르는 저스틴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부모가 저스틴을 채식이라는 방법으로 통제해온 것과 같다.
이 우유 표면의 얇은 막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비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등장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는 우유 표면의 얇은 막은, 부모가 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를 분리하려는 표시이기도 하며, 아이는 그것을 원하지 않지만, 그것을 먹으며 아예 스스로를 비체화한다고 설명한다. 비체는 특히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두드러지는데,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려는 아이의 시도 안에서, 어머니의 피가 흐르는 나 역시도 비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체는 삶을 위협하지만, 주체는 비체를 추방하는 동시에 묵인한다. 왜냐하면 비체는 삶을 위협하는 동시에 삶을 규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로우>에서 뱉어지고 거부되는 음식은 비체와 같은데, 이렇게 뱉어지는 음식물처럼 영화에서 어머니의 형상은 프레임 바깥으로 뱉어진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저스틴의 식인에 대한 욕망은 폭동하는데, 이를 중화하는 방법 중 하나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남성이다. 남성과의 결합은 피를 중화시켜줄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인데, 파란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저스틴은 노란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남자와 함께 초록색이 될 때까지 나올 생각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화장실에 갇힌다. 저스틴의 신체에 남자의 초록색 손자국이 남겨 질 때쯤, 저스틴은 남자의 입술을 물어 버린다. 이내 저스틴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페인트를 씻어 내고, 자신의 흔들리는 유치를 뽑아 그것을 삼킨다.
왜냐하면 저스틴은 식인에 대한 엄청난 욕동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자신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이는 즉, 자신과 같은 피를 나눈 언니 알렉스의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저스틴과 알렉스의 시스터우드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저스틴과 알렉스가 엉켜 싸울 때, 그들은 서로의 팔을 물고, 이때 그들의 표정은 고통보다도 만족이다. 또한 저스틴이 알렉스를 찾아갔을 때, 알렉스는 소의 항문에 팔을 집어 넣고 있다. 알렉스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찰나, 알렉스는 소의 배설물을 외부로 꺼낸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씬에서 그들은 옥상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다 서서 오줌을 싸는데, 이때, 이 아브젝트한 신체의 배설물은 혐오뿐만 아니라 유희가 된다. 이 자매의 기묘한 놀이는 어머니에 의해 행해지는 ‘몸에 대한 최초의 지형도 그리기’인 배변 훈련에서 수치심이 없는 어머니의 세계와 수치심의 세계인 아버지의 세계를 구분하며 신경증을 유발하면서도 완벽한 사회화를 일으킨다. 2)
영화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 쇼트까지 저스틴의 선택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상처로 뒤덮인 상체를 볼 때, 저스틴의 표정은 알렉스가 저스틴이 자신의 손가락을 씹어 먹을 때의 표정과 같다. 대대로 내려오는 피의 저주에서 저스틴의 어머니는 남편을 만나 그의 살점을 조금씩 맛보고, 저스틴의 언니 알렉스는 스스로 사냥하는 방법을 터득해, 자신의 동생에게 이 방법을 전수하지만, 저스틴의 룸메이트이자 저스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알리앙스의 다리를 먹고 죽게 만들어 감옥에 갇힌다. 알리앙스는 자매의 아버지와는 달리 게이이므로, 자신들의 대리인이 되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의 조련사라기 보다는, 관습적 공포영화의 여자-괴물처럼 희생자 혹은 자발적 제물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스틴은 그의 어머니처럼 아버지와 같은 남성을 만나 어머니가 되어야 할지, 아니면 알렉스처럼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에 (의도적으로) 실패하여 격리되던지, 아니면 마지막 대사처럼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1) 바바라 크리드 ; 손희정 옮김 , 여성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2017, 35p
2) 같은 책, 42p